[영화]가위질 끝나도 '도끼'는 남았다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6.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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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외화 수입 거부할 수 있는 추천권 여전히 독점… 남용하면 사실상 검열
표현의 자유. 그 소중한 국민의 기본권을 가로막아 온 ‘검열’의 장벽이 결국 무너졌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헌재) 전원 재판부(주심 김문희 재판관)가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제를 위헌이라고 결정함에 따라 1922년 일제가 ‘흥행 및 취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지 75년 만에 ‘가위질’이 끝나게 되었다.

혁명적이라 할 헌재의 결정이 나온 뒤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무성하다. 사전 심의가 등급 심의로 대체됨에 따라, 등급을 받지 못한 ‘등급외’ 영화를 어디에서 상영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떠올랐다. 문화체육부가 여전히 외국 영화 수입 추천권을 가지고 있어 수입 거부 ‘남용’에 대한 우려도 일고 있다.

헌재가 발표한 위헌 결정문을 냉철히 분석하면, 소모적인 논쟁은 피할 수 있다. 헌재의 한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재판관 전원 합의로 채택된 이번 위헌 결정은 재판관이나 연구관들 사이에서 별다른 논쟁 없이 채택되었을 정도로 명백한 법리를 전개했다. 위헌 결정문의 핵심은 검열에 대한 개념 정의에 있다.

검열의 본질은 ‘행정기관이 주체가 되어 영화 상영 여부를 사전에 허가하는’ 것이다. 즉 △판단 주체가 ‘행정기관’인지 △‘사전’에 제약이 가해지는지 △상영 ‘여부’를 허가하는지로 세분되는데 이 세 조건이 모두 적용될 때만 검열로 규정된다. 세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만 충족되지 않아도 검열이 아니다. 다시 말해 행정기관이 상영 여부를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 정하는 사후 규제, 행정기관이 상영 여부가 아니라 ‘방식’을 사전에 지정하는 등급 심의, ‘행정기관이 아닌’ 법원으로 하여금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상영을 금지시켜 달라고 신청하는 가처분 제도는 검열이 아니다.

가처분 제도말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영화 상영 자체를 사전에 불허해서는 안된다. 바로 검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등급외 영화를 일반 극장에서 상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로 이 점이 등급외 판정을 받은 영화를 개봉할 전용 상영관이 필요한 이유이다.

문화체육부는 현재 등급외 영화관을 허용하느냐에 대해 가타부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영화진흥법 개정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켜 여론을 수렴한 뒤 결정하겠다며 의견 표명을 미루고 있다.

등급외 영화관이 없는 현 상황에서 맨 먼저 불거져 나온 갈등은 일부 외화 수입사들이 제기한 ‘무삭제 상영 계획’이다. 카톨릭 신부의 동성애 베드신 등 필름 1분30초 분량을 사전 심의에서 삭제 당한 영국 영화 〈프리스트〉의 수입사 유성필름은 필름을 원상 복구하여 상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성과 관련한 충격적 화면 6분 분량을 사전 심의에서 삭제하거나 화면을 뿌옇게 처리했던 기록 영화 〈쇼킹 아시아>(수입사 월드시네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 조항이 효력을 상실했어도 영화에 대한 사후 규제는 유효하다. 즉 음란성이 문제가 되면 형법에 의해, 폭력성이 시비를 불러일으킬 경우에는 아동복지법 제18조에 의해 형사 처벌과 함께 상영을 정지시킬 수 있다(도표 참조).

외화 수입사들의 무삭제 상영 계획은 극장주들이 이에 화답하지 않아 촌극으로 끝날 조짐이다. 지난 7일 문체부가 공륜에 잠정적으로 등급 심의 업무를 맡기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서울시극장협회는 같은 날 오후 긴급 이사회를 열고 등급외 판정을 받은 영화는 상영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영화인들은 문체부가 영화진흥법 제10조에 의해 외국 영화 수입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수입 추천권을 갖고 있어 이 권한을 남용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문체부는 이 권한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외화를 수입하려면 영화 대본, 수입 약정서 등 관련 자료와 함께 공륜의 심의 확인서를 문체부에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공륜이 잠정적으로 맡고 있는 등급 심의 업무를 법 개정과 함께 민간 기구에 이양하더라도 문체부는 여전히 수입 추천권을 통해 특정 외화 상영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그나마 사전 심의를 받아 필름을 자르고라도 상영할 수 있었던 과거보다 더 심각한 규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형태 변호사는, 문체부의 수입 추천권을 규정한 영화진흥법 제10조를 ‘위헌’이라고 규정한다. 말만 수입 심의이지 정부가 사전에 상영 여부를 결정하는 한 검열이라는 뜻이다. 김변호사는, 사전 심의를 거치지 않고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와 같은 독립 영화를 상영했다가 구속된 제작소 ‘장산곶매’ 대표들의 소송을 대리하며 헌법소원을 청구해 결국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수입 추천을 거부 당한 외화 수입사들이 행정 소송을 제기할 경우, 문체부의 수입 추천권은 법원의 위헌 법률 심판 제청, 혹은 소송 당사자의 헌법소원에 의해 위헌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헌재가 한국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만 검열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호주 등 일부 선진국들도 외교 마찰이나 자국 문화 보호 등을 이유로 외화 수입을 제한하고 있을 정도로 수입 추천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84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외국 영화 수입을 규제한 관세법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일본 최고재판소는 세관이 고유 업무에 따라 수입을 제한할 뿐이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볼 수 없다는 ‘아리송한’ 법리를 전개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영화진흥법 제10조가 설령 위헌으로 결정되더라도 관세법 제146조 제1항에 의거해 외화 수입이 제한될 수 있다. 이 조항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공안 또는 풍속을 해할 서적·간행물·도서·영화·음반·비디오물·조각물 기타 이에 준하는 물품’에 대해 수입 또는 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수입 추천권 놔두려면 민간에게 맡겨야”

사전 심의 철폐 운동을 주도한 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은, 수입 심의위원들이 합격시킨 영화를 문체부가 자의적으로 추천 거부하는 경우가 수입 추천권 조항 자체보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수입 추천권을 존속시키려면 이 역시 수입 심의권과 함께 민간 기구에 맡겨야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했다.

문체부가 수입 추천권을 독점한다면 ‘충돌’이 잦아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삭제 상영되어 물의를 빚었던 미국 영화 〈크래시>(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는 공륜이 아예 수입 심의 과정에서 불합격 판정을 내린 영화이다. 하지만 사제지간의 불륜을 파격적으로 묘사한 스웨덴 영화 〈아름다운 청춘〉(보 비데베르그 감독)은 공륜이 합격 판정을 내렸는데도 문체부가 영화의 ‘비윤리성’을 이유로 수입 추천을 거부해 수입업자가 신청을 자진 철회한 영화이다. 영화인들은, 공륜이 통과시킨 영화도 거부했는데 민간 기구가 심의한 영화라면 문체부의 ‘거부권’이 오죽할까 걱정한다.

영화인들은 공륜을 폐지하고 민간 자율 심의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문체부는 등급외 영화관의 경우처럼 이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공륜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에 뚜렷한 의사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문체부로서는 여전히 자기 산하에 등급 심의 기구를 두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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