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대량 해고가 회생 대책인가
  • <시사저널> 취재2부장 직무대행 ()
  • 승인 1998.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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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총수들은 정리 해고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반드시 한번쯤 비통하게 떠올려야 한다.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사원들의 얼굴을.”
올3월은 북풍으로 시작해 북풍으로 끝나가고 있다. 북풍의 실체적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를 둘러싼 여야간 정치 공방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국민에게 던진 충격과 혼란은 실로 엄청났다. 그런 와중에 북풍과는 성격이 다른 큰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칠 채비를 하고 있다. 그 바람이 몰고올 파장은 북풍보다 심각하고, 그 피해 범위는 북풍보다 훨씬 광범위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실업풍’이 바로 그것이다.

기실 이 바람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그 예고편을 선보였다. 한계 기업과 중소 기업들의 도산이 잇따르고 화이트 칼라에 대한 부분적인 정리 해고가 단행되면서 1차 실업자가 발생했고, 이들 중에서 자살자까지 속출했다. 실직자를 상담하는 노동부 일선 부서들은 벌써부터 폭주하는 업무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업풍의 가공할 파괴력을 살짝 내비친 것일 뿐이다.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은 4월부터 생산직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정리 해고에 돌입할 예정이다. 게다가 외국 기업의 우리 기업 합병·매수(M&A)와 우리 기업 간의 빅딜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어서, 이 과정에서도 실업자가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올해 실업자 수를 1백50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지만, 모건 스탠리 같은 외국 투자기관은 2백만명 선으로 내다보고 있다. 심지어 정리 해고가 자본의 욕구대로 무분별하게 진행된다면, 실업자가 2백만을 넘 어서리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나온다.

노·사·정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합의한 정리해고제 조기 실시의 타당성을 이제 와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가 고실업 상태를 견뎌내려면 실업 증가 속도가 가파르지 않아야 하며, 실업의 충격을 사회가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고실업과 복지 국가의 두 틀을 유지해 온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비교적 빠르게 구조 조정이 진행되었다는 미국조차도 무려 10여 년에 걸쳐 인력 조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어느날 갑자기 ’대량 해고 사태에 직면했다. ‘평생 직장’이라는 감수성으로 살아 온 직장인들에게 정리 해고는 단지 ‘밥그릇’을 박탈당하는 생존 문제만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 전체가 부인당했다는 실존 문제로 확대 해석되기가 십상이다. 설사 애써 마음을 다잡아서 몸을 낮추어 취업하거나 적은 자본으로 장사를 하려고 해도, 3D 직종조차 일할 자리가 모자라고 경험 있는 상인조차 손을 드는 IMF 현실에서는 그마저 여의치 않다.
회장님, 한번 더 생각하십시오

실업의 충격을 흡수할 사회보장 제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실업 내각’이라고 규정한 새 정부가 공공 사업을 통한 일자리 만들기와 사회 안전망 구축 등 다각적인 실업 대책을 모색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정부 대책에는 막대한 재정 부담이 뒤따르므로, 정부로서는 아이디어만큼 정책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4월부터 사회가 감당하기 버겁게 실업자가 양산된다면, 실업자를 관리하는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고,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군은 심각한 사회 불안 요소로 떠오를 것이다.

고육지책으로 정리 해고를 단행하려는 대기업에게도 과연 정리 해고가 만병통치약인가는 의문이다. 일찌감치 해고의 자유를 구가해 온 미국의 경영자들도 최근 들어 대량 해고의 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94년 미국경영자협회(AMA) 조사에 따르면, 인력 감축으로 경영 지표를 개선한 기업은 32%밖에 안되고,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대량 해고가 노동자들의 사기와 충성심을 떨어뜨리고 조직을 이완시켰다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들은 정리 해고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반드시 한번쯤 비통하게 떠올려야 한다.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사원들의 얼굴을. 그리고 한번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이 사인하는 정리 해고의 규모가 과연 기업 회생을 위해 불가피한 최소한의 것인가를. 그리고 당신이 해고를 회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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