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포르노가 무색한 음란한 현실
  • 백지숙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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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카메라로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무한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증언성과 실제 복제력은 문자·음성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며 심지어 전능하기까지 하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성과 권력의 ‘아랫도리’가 말 그대로 철석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 비뇨기과의 폐쇄 회로 카메라에 잡힌 현직 대통령 아들의 얼굴은 그 관계를 충실히 드러내 주는 하나의 콜라주 작품이다. 의미의 집적보다는 충돌의 원칙에 충실한 콜라주답게, 거기에는 어떤 울림이나 깊이도 없으며 단지 충격과 감각적인 신산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훌륭한 여느 콜라주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부딪침으로써 얻게 되는 이른바 변증법적인 효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 속의 이음새는 ‘음경 보형물 삽입 수술’처럼 철저하게 한 가지 효과만을 갖는 것 같다.

이번에 나는 처음으로 ‘사실과 비화’ 류의 타블로이드판 주간 신문을 사보았는데, 어쩐지 그 신문에는 주류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실’들, 가령 김현철씨가 비뇨기과에서 상담했다는 병명,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삭제되었다는 비디오 녹화 내용, 너무 노골적이어서 아이들이 볼까 무섭다는 박경식씨의 성의학책 도판 등등이 실려 있을 것 같아서였다. 또 적어도 ‘큰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생물학적인 페니스(penis)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팔루스(phallus)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편집·복사 통해 얼마든지 조작 가능

이번 사건에서 그나마 문화(?)론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포함한 전국민의 관음증적 호기심을 발동시킨 시각성 내지는 시각적 권력과 결부된 일련의 문제들이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음증(voyeurism)과 절시증(scopophilia)은 구별된다. 상대방의 동의 여부가 기준이 된다면, 박경식씨의 비디오 테이프는 절시증적인 것으로 범죄적인 시지각 방식에 기초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히 제도화 유무에 있지 않다. ‘도청 오다쿠(마니아)’들처럼 그야말로 순수하게 취미로 도청하는 경우 비록 범죄 요인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반드시 도청당하는 사람들에게 유해하다고 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반면에 이한영씨 피격 사건과 관련된 은행 폐쇄 회로 화면이나 정태수씨 사건과 관련되어 유무 논란이 있었던 호텔 폐쇄 회로 화면은 공공의 이익과는 별도로 비디오에 기록된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당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미지에 관한 권력 행사 문제이다. 이미지의 증언성과 실제 복제력은 문자나 음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고 직접적이며, 심지어 전능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강력함 때문에 이미지를 기록하고 관리하며 사용하는 생산자의 권력은 ‘따따블’로 강해진다. 이미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무한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간 이런 시각적 권력은 지하철이나 은행 등의 장소에서 보안용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이번처럼 의사 같은 전문가적인 권력과 결탁될 가능성 또한 만만치 않다고 여겨진다.

박경식씨의 경우는 예외로 치더라도, 치료 목적으로나 의료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또는 학문 연구를 위해 의사들이 제작하는 비디오들도 결국은 전문가들 자신의 이익과 권한을 보호·확대하기 위해서 환자의 치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카메라를 쥔 사람의 일방권력적 속성, 의사들이 환자에 대해 갖는 그 권력의 막대함을 생각한다면 설사 환자가 기록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진짜 동의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몰래 카메라 방영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는 수많은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덧붙여 편집 과정에 개입되는 권력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번 경우에도 드러났듯이 부분을 지우거나 전체를 편집하고 복사하는 과정에서 각 당사자의 의도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바꾸기’ 가 가능하다. 이미지 독법에 제아무리 익숙한 사람이라도 전후 맥락에 따라 같은 이미지가 얼마나 달리 해독될 수 있는가를 때때로 망각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하는 우리에게 차라리 필요한 것은 포르노적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온한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시선과 달리 적어도 포르노는 그 깊이 없는 스펙터클의 즉물성에 그대로 집중하게 한다. 상대를 가리거나 숨기거나 지우지 않고 그대로 까발려 보여주는 대척적인 시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포르노의 음란함은 현실의 음란함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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