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세 여성 감독이 만든<에로띠끄>
  • 전찬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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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성 감독이 세 대륙 무대로 도발적 성 묘사…허위 의식·그릇된 환상 꼬집어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섹스를 소재로 한 본격 성애 영화다. 아메리카(미국), 유럽(독일), 아시아(홍콩) 세 대륙에서 선정된 여성 감독 세 사람이 자기 색깔을 가지고 세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주제와 분위기, 강조점 등은 다르지만 영상과 대사 모든 면에서 노골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미국에서 일반 매체를 통한 광고와 18세 미만 관람이 금지되는 NC 17 등급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에로티시즘에 관심이 많은 관객이 아니더라도 절로 입맛이 당길 만하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양산되어 인기리에 유통되는 비디오 성애물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다. 적나라하고 때로 천박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에로띠끄>는 섹스, 특히 여성의 섹스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흔드는 ‘도발적’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도발성이 하도 강해서 보수적인 대다수 남성 관객들은 당황할 것이 틀림없다. 재고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요, 포르노그라피라고 단정할 법도 하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성은 남성이 주도해야 하며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관념과, 섹스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그 무엇이라는 환상을 뒤집고 깨부수려 한다는 것, 그에 동의하느냐 여부는 물론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만 말이다.

남성 중심의 성 의식도 정면 공격

첫 번째 이야기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로스앤젤레스의 폰 섹스 업소에서 일하는 로지는 배우가 되고 싶지만 오디션 때마다 실패한다. 고객의 얘기를 듣는 것이 지겨워진 그녀는 어느날 자신의 환상을 들어주는 남자와 통화하게 되고, 마침내 정신과 의사인 그를 찾아가 섹스를 한다.

로지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성희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다. 영상도 영상이지만 성기를 지칭하는 어휘들의 차이가 설명되는 등, 대사가 세 편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폰 섹스를 통해서 섹스에 대한 허위 의식과 그릇된 환상을 꼬집었다. 또한 이미 말했듯이 성은 신비스러운 것이고 숨겨야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제 1회 여성영화제에서도 소개된 페미니즘의 대표작 <불꽃 속에 태어나서>(83)와 <워킹걸>(86)로 유명한 리지 보덴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두 번째 이야기는 <금지된 방>. 독일 함부르크에서 동거 중인 두 레스비언이 남자 헌팅을 나간다. 바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를 골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집에서 섹스를 한다. 질투하는 한 여자가 둘 사이에 끼여들어 방해하고, 남자는 떠난다. 차에 타는 남자, 차가 폭발한다.

이 영화에 따르면, 동성애는 더 이상 변태가 아니다. 숨길 필요가 없는 당당한 사랑이다. 그뿐 아니다. 성욕이 일어나면 애인이 있는데도 남자를 꼬드겨 즐길 수도 있다. 여성의 욕정을 묘사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성의식, 성행위에 대해 정면 공격한다고나 할까. 일반적 삼각 관계가 전복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세 감독 중 제일 낯선 모니카 트로이트가 각본과 연출을 동시에 맡았다.

마지막 이야기, <완탕 스프>. 무대는 홍콩. 중국계 호주인 청년이 고향인 홍콩에 와 연상의 연인을 만나지만 문화적 이질감으로 헤어진다. 그는 삼촌의 조언을 듣고는 중국 고서에서 배운 다양한 중국식 체위를 통해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섹스가 정체성의 매개로 사용된 것이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좋고 화면도 세련되었다. 말 그대로 다양한 체위를 선보이는 섹스 연출은 압권이다. 자연스럽고 유머가 넘친다. 섹스신에 약한 우리나라 감독과 여배우 들이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섹스에 여념이 없는데 여자는 줄곧 웃는 설정도 의미 심장하다.

<떠도는 삶>으로 여성 영화제에 소개된 클라라 로우가 연출했는데, <가을의 달>(92) <라스트 템프테이션>(93) 등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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