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승희 증후군'
  • 조형준 (문화 비평가) ()
  • 승인 1997.06.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희의 누드가 음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민족(주의)과 학력(그리고 출세)’이라는 2개의 창으로만 보는 우리 문화가 매우 저급하고 음란한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에 따르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한다’. 나는 최근 ‘인터넷의 여왕’이자 ‘세계적인 톱 모델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한 누드 모델’이라는 이승희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을 보면서 이 명제를 떠올렸다. 물론 이 누드 모델에 대한 일부 비평가들의 신경질적 반응과 함께, 그를 ‘자신의 몸과 사업에 대해 당당한 견해를 가진 철학자’로까지 치켜세우는 일부 대중 문화 비평가들(?)의 영악한 옹호론도 잘 안다.

아무튼 5백년 동안 기생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아랫도리 이야기에는 엄격한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온 이중적 성문화가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상태에서 ‘성’문제에 대한 논의는 우리 문화의 성숙도 내지는 지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

이승희의 ‘누드 철학’은 신세대의 자기 선언

최근 ‘인터넷 누드 스타’라는 이름으로 국내 대중 매체를 휩쓸고 지나간 이승희가 설파한 ‘누드 철학’은 우리의 ‘순수이성’과 윤리를 비판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서는 막상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승희 증후군’은 여전히 누드냐 포르노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외설이냐 예술이냐 하는 상투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희 본인은 포르노와 누드가 결코 동일시될 수 없으며, 벗은 몸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우며, 자신의 벗은 몸매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먼 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찾아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는 말로 ‘침실의 철학’을 피력했다. 나는 이처럼 영악하게 ‘신세대의 철학’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사람은 서태지 이후에 거의 없었다고 믿는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라는 단 한마디로, 상투를 틀지 않으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취급하던 우리의 보수적인 문화를 극적으로 역전시켰다면, 이승희의 누드 철학 또한 분명히 신세대의 자기 선언을 보여준다. 20세기에 들어와 벌건 대낮에 ‘벗은 몸이 가장 아름다우며, 누드 모델 또한 龜炸?하나의 직업’이라는 것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음지의 문화가 양지로 연착륙한 것이다.

이승희의 누드는 외설이라는 혐의를 씌울 수 있는 어떤 포즈도 취하지 않는다.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것은 전략적으로 철저히 배제된다. 막상 이승희의 누드 사진을 보는 남성이 실망해 하는 눈초리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오히려 일부 여성들의 가슴 수술을 부추겼을 뿐이다). 이 점을 보지 못하면 이승희의 인기나 그를 둘러싼 소동의 진실에 한 발짝도 접근하지 못한다(미야자와 리에의 사진집은 외설 판정을 받았지만, 우리의 ‘도덕 수호자’인 검사들의 눈에도 이 사진집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싱싱 냉장고처럼) ‘싱싱함’이라는 자연의 신화를 집중 부각하고 있다.

학력·미국 콤플렉스 파고들어 ‘성공’

그리고 이처럼 전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당당한 직업관이 추가된다. 게다가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코드에 미국에 가서 고생 끝에 성공한 코리언이라는 코드와 ‘일류 대학 의대에 다닐 때 A학점 장학생’이라는 코드가 포개진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고급 매체(?)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겨우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나 ‘고전’ 취급을 당하는 ‘~부인’이나 ‘에로 배우’들과 달리 이승희가 몸이 10개라도 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칙사 대접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그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학력 콤플렉스’와 ‘미국 콤플렉스’를 파고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승희의 누드가 음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민족(주의)과 학력(그리고 출세)’이라는 2개의 창을 통해서밖에 바라볼 줄 모르는 우리 문화가 매우 저급하고 음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재일 동포 작가 유미리를 둘러싼 일종의 소란을 통해 이러한 민족 콤플렉스와 학력 콤플렉스를 목격한 바 있다. 속된 말로 무엇 눈에는 무엇만 보이는 셈이다.

우리는 언제 책상이 없어질지 모르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싱싱한 몸은커녕 이미 출근할 때부터 온몸이 파김치가 된다. 일할 때는 온몸이 뻐근하다가 퇴근하기만 하면 온몸에 활기가 돈다는 만성피로 증후군이 체화되어 있다. 이승희 증후군은 누드 배우의 싱싱한 몸매에 투영되어 있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싱싱한 몸도, 40대에는 재벌 회장이 되어 보겠다는 야무진 직업관도, 게다가 철학도 아예 부재한 우울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초라한 우리에게 그나마 남겨진 유일한 볼거리이자 위안거리인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