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타락했다
  •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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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라크의 막대한 석유 자원을 장악하고, 중동 지역에 군사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쇠퇴하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유지해 보려는 추악한 시도였다. 팔루자 공세와 수감자 학대
베트남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1975년 4월30일이었다. 북 베트남과의 파리 평화협정에 따라 1973년 3월29일 미군이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한 지 2년 1개월 만이었다. 미국 정부는 공식으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승부라는 견해이다. 북 베트남에 의한 베트남 통일은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손을 뗀 후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당초 전쟁 목적이 베트남 공산화 저지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패배는 자명하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1968년에 분명히 드러났다. 이른바 구정 대공세가 그것이다. 그해 1월31일, 베트남 저항 세력은 음력 설을 기해 남 베트남 전역에서 미국대사관과 미군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군사 측면에서 이 공세는 저항 세력의 패배였다. 저항 세력측의 사상자가 미군의 수십 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완벽한 승리였다. 베트남 인민의 반미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다.

구정 대공세를 계기로 전세계의 반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미국 국민의 베트남 전쟁 지지는 1965년 64%에서 1969년에는 31%로 뚝 떨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달 후 존슨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북 베트남과의 평화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현직 대통령의 재선 출마 포기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인민에 대한 정치적 패배를 자인한 셈이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에 입힌 타격은 컸다. 우선 1968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공화당 닉슨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1932년 루스벨트 당선 이래 30여 년간 유지되어 온 민주당의 권력 독점이 무너지고 보수적인 공화당 체제가 들어서는 서막이었다. 막대한 전비 지출로 미국 경제가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은 더 뼈아픈 타격이었다. 결국 1971년 8월15일 닉슨은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했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던 고정 환율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키신저의 비밀 외교로 중공과 관계 정상화를 이룬 것은 베트남 전쟁 패배에 따른 미국 패권의 쇠퇴를 막아보려는 고육책이었다.

이라크 전쟁도 베트남 전쟁의 구정 대공세에 비견될 만한 분수령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지난 4월 초, 미군의 팔루자 공격과 4월 말 CBS 등 미국 언론에 의한 이라크 수감자 학대 폭로가 그것이다.

미군은 3월 말 발생한 팔루자 시민들의 미국인 시신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팔루자에 대규모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미국은 수백 명에 달하는 무고한 이라크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 ‘시신 테러 범인 색출, 저항 세력 무장 해제’ 등 당초 목적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저항 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세계의 비난 여론에 부딪혀 후세인 정권의 공화국수비대에서 요직을 지낸 전직 장성을 팔루자 치안 책임자로 임명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라크인들의 민심을 잡지도 못하고, 이들을 무력 진압하지도 못한 채 불안한 점령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부시에 견주면 존슨은 ‘도덕군자’

4월 말 이후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 수감자 학대는 미국의 도덕적 타락과 함께 이 전쟁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초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략했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도, 알 카에다와의 연계도 드러나지 않음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민주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강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준 수감자 학대의 진상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오만한 점령군의 비인간적·비민주적 실상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의존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라크의 막대한 석유 자원을 장악하고, 중동 지역에 군사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쇠퇴하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유지해 보려는 추악한 시도였다. 팔루자 공세와 수감자 학대 등을 통해 이러한 미국의 참모습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진실의 순간은 이미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결코 이라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변한다. 36년 전 존슨 대통령이 보여주었던 만큼의 도덕성도 지금의 미국 지도자들은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은 타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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