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실망 안겨준 장선우의 감독의 '나쁜 모험'
  • 김시무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7.08.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출 청소년 문제 ‘침소봉대’ 오류 저질러… ‘표현 자유’ 주장할 영상 미학 부족
장선우 감독은 한 지면에서 <나쁜 영화>는 요즘 지탄받는 이른바 비행 청소년의 보편적 문제를 담았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과연 <나쁜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들의 총체적인 삶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출 소녀라면 누구나 팬티 하나만 걸치고 거리로 나서는가. 가출 소년이라면 누구나 친구들을 해코지하고 여자 친구를 겁탈하고 윤간하는가. 가출 소년들은 누구나 친구의 영정 앞에서 권태로운 춤을 춘다는 말인가. 영화를 보면, 돌발 퀴즈 형식으로 우리나라의 가출 청소년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질문이 나온다. 답은 ‘엄청 많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두 영화 속의 나쁜 아이들이 밟은 경로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말인가. 문제는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해 절대화하는 장감독의 접근 방식이다.

이는 장감독이 진짜 나쁜 아이들을 캐스팅하게 된 이유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실제의 인물들이 출연해야 좀더 진솔하고 꾸밈없는 영화가 될 수 있으리라는 직접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진짜 깡패가 출연했다고 해서 그 영화가 진정한 갱스터 무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감독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배우를 적당히 섞어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이 영화가 진정 비행 청소년들의 관점에 서고자 했다면, 그리하여 이들을 거리로 내몬 어른들의 위선과 불관용을 질타하고자 했다면, 조금 더 우회하더라도 ‘페이크 시네마’ 방식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지향했어야 옳다고 믿는다. 무슨 말인가. 감독은 진짜 나쁜 아이들을 캐스팅해 놓고 어이없게도 그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재현하도록 했다. 즉 연기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야 좀더 리얼하다나. 때문에 감독은 ‘정해진 것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필자는 <트레인 스포팅>에서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와 레드변(변상규)의 연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연기라면 말이다.
정작 문제는 이 영화가 공륜의 시대착오적 협박을 무력화할 만큼의 가치 전복적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쁜 아이들의 비행 장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음란한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사실을 편견 없이 나열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진실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에 대해 나쁜 아이들의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편협한 시각(공륜적 시각)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소재 자체가 아니다. 아이들의 윤간 장면을 보고 스틸 담당자처럼 ‘너무했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사실 이는 일종의 안전판이다), 혹은 은밀하게 관음증적 쾌락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성인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쁜 영화>는 통속적 의미에서 성인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시각에서 만들었느냐가 먼저 선행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윤간·오럴 섹스와 어른들의 성추행 장면 등이 심지어 성인 관객에게조차 유해하니 잘라야 한다는 공륜의 주장이나, 비행 청소년들이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에서 우리 사회의 미성숙을 엿볼 수 있어 씁쓸할 뿐이다. 양자 모두 ‘무엇’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왜 이렇게’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더라도 <나쁜 영화>의 존재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끊임없이 변신해온 감독의 작품 편력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장감독의 작품들은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특정한 ‘문제틀’이나 어떤 ‘이즘’에 따라서 일률적으로 꿰어 맞출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그는 어떤 때는 ‘예수 신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부처 신화’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의 데뷔작인 <서울 예수>(86년)가 전자에 해당하고, 고 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화엄경>(93년)은 후자에 해당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장감독의 초기작 <성공시대>(88년)와 <우묵배미의 사랑>(90년) 등이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면, 그의 비교적 최근작인 <너에게 나를 보낸다>(94년)와 <꽃잎>(96년) 등은 모더니즘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렇듯 장감독은 기독교에서 불교로, 또는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부유한다. 혹자는 <나쁜 영화>를 만든 장감독의 모습에서 장자(莊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장감독의 끝없는 실험 정신, 그러나…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성 담론의 물꼬를 튼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성 문제는 기존 영화들의 성 표현과는 전혀 다르다. 즉 지금까지 성을 대상화·신비화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 왔다면, 이 영화에서는 성을 우상파괴적(iconoclastic) 방식으로 취급했다. 먼저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쓰레기 같은 성의 모습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두 번째로 이 영화가 우상파괴적인 이유는, 이처럼 ‘음란한 사회’에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기 위하여 ‘포르노그라피’라는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포르노와 다를 바 없는 사회를 포르노 같은 영화로 비판한 셈이다.

장선우 감독의 실험 정신은 영화 <꽃잎>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감독의 무당파성 내지는 영화적 실험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손상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80년 5월 저 남도의 빛고을 광주에서 일어난 민족사적 비극을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사건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의 잠재 의식에 내재해 있는 폭력성 일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 여기서도 역시 일반화(보편성)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나쁜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장감독의 영화적 모험에 ‘나쁜 아이’들이 동원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