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게가 자식보고 똑바로 걸으라 한다
  • 이성욱 (<문화과학> 편집위원) ()
  • 승인 1995.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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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을 정돈시켜서 특정한 목표로 끌고 가겠다는 것은 파시즘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교육은 특정한 지점으로 청소년들을 염소몰이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최대의 기회를 허용하여 그 체험 속에서 상상
나는 불량 학생이 아니었다. 그저 교복 윗 단추 하나 정도 풀고 다녔고 학과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뿐이지, 폭력 서클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다른 학우들의 돈을 ‘삥’ 뜯지도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지당하신 훈계가, 혹은 학교가 요구하는 규율의 엄격함이 불량 학생으로 추락하는 데서 나를 구한 것도 아니거니와, 나를 키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청소년기에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학교 밖 문화였다. 거기에는 대중 문화도 들어 있고 교과서 밖의 책들도 들어 있었다. 우리에게 학교 교육의 목표나 교과 과정, 선생님의 ‘공자님 말씀’은 콧방귀의 세기를 실험하기에 딱 좋은 소재일 뿐이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각종 폭력과 억압,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학교라는 형상에 대해 그런 냉소적인 태도를 발효시키는 효모균이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무척 화가 난다. 적어도 중·고등학교 6년간 인간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칸트 아저씨의 말씀을 교과서에서 보고 또 외웠지만, 우리는 단지 수단이었고 수능시험 고득점이 교육의 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세대 누구나 겪은 뻔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면 지금은? 지금 청소년들은 교육다운 교육 환경 속에서 사람 대접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청소년들의 정서를 대표한다는 서태지와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에서는 기성세대의 가르침에 대해 단 한마디로 역습한다. “아, 됐어!” 라고.

기성세대가 청소년의 교육 받을 기회를 ‘퍽치기’한 것 아닌지

일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책을 보면서 나는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고, 종내는 심하게 분노가 치밀었다. 들뢰즈 사유 체계의 그 분방함, 박람강기, 끊임없는 실험정신, 종횡무진한 상상력의 놀라운 에너지 들을 따라잡기에 나의 사고력과 상상력의 심폐 기능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화가 난 까닭은 그것이 내 머리의 지둔함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들뢰즈 작업의 기반은 그가 청소년기에 배우고 익힌 생각이다. 한데 나는 같은 연령대에 그런 것을 배운 바도 없거니와 부끄럽게도 나이 서른이 넘어서 들뢰즈가 열여섯 살 때 배운 철학·수학·물리학 ‘요강’ 등을 새로 익혀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면 중·고등학교 때 그 잘난 학교 교육은 대관절 내게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는 억하 심정 때문이었다. 청소년기에 누려야 할 교육의 기회를 우리 사회의 제도 교육과 기성세대의 과잉 친절이 ‘퍽치기’해 간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청소년 야간통행 금지법’ 입안 고려나 ‘학교 폭력 일제 소탕’이라는, 청소년에 대한 신판 삼청교육대적 상상력을 접하고 나서이다. 이런 대접은 청소년들을 타락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이른바 문제 학생은 교정 혹은 격리 해야 한다는 ‘충정’에서 출발한다. 이 때 청소년들은 보호와 교정을 자임하고 나서는 기성세대에게 질문한다. 과연 당신들이 그런 자격이 있느냐고. 혹시 당신들이 그런 교정의 대상이 아니냐고. 만약 지금 청소년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잘못 때문이다. 청소년의 잘못을 방조·조장한 것은 잘못된 점에 대해 청소년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원천 봉쇄한 기성세대의 오만과 착각이다. 성찰은 기성세대부터 해야 한다. 그러나 기성세대 역시 성찰하는 태도와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에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의 청소년 대책안을 보면서 우리는 익숙한 무엇을 떠올린다. 그것은 지난 몇십 년간 우리 사회의 결을 직조해 온 파시즘이다. 청소년들의 머리 속과 행동의 열과 오를 정돈시켜서 특정한 목표로 끌고 가겠다는 것은 바로 이 파시즘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이런 발상은 이 사회가 성인만의 사회라는 오인에서 출발한다. 이 때 청소년은 성인들에 의해 관리·훈육되어야 하는 잉여 집단으로 간주되고, 인간 대접을 받아야 하는 온전한 주체로서는 제외된다.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은 기성세대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회와 부딪치면서 이루어진다. 교육은 특정한 지점으로 청소년들을 염소몰이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최대의 기회를 허용하여 그 체험 속에서 생각과 상상력의 두터움과 이를 확장할 계기를 발견하게끔 거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그들에게 들뢰즈의 강인한 사고나 스필버그의 재기 넘치는 상상력, 아니 최소한의 시민마저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문제 학생,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과 처방전이 여전히 파시즘적 발상에서 나온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 때 그 문제 학생은 결국 다시 파시즘적 성인으로 성장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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