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여, 다시 고전에 주목하라
  • 고미숙 (고전 평론가) ()
  • 승인 200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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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보이>를 통해 구미적인 감각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면, 앞으로는 좀더 긴 호흡으로 ‘오래된 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내는 작업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아직 영화 <올드 보이>를 보지 못했다. 박찬욱 감독과 배우 최민식의 열성 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를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나, 영화가 처음 나올 때부터 눈여겨본 때문인지 가끔은 영화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개봉 이후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기 때문이리라. 가둔 자와 갇힌 자 사이의 치밀한 심리 묘사,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엽기적 복수, 상상을 뛰어넘는 기막힌 반전. 이런 류의 단평은 하도 많이 들어서 거의 외울 지경이 되었다.

보통 텔레비전의 영화 프로그램에서 예고편을 보고 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올드 보이>는 그토록 많은 소문을 접했음에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꼭 보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사르게 하는 좀 특별한 사례에 속했다. 스릴러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가 대강의 스토리와 충격적인 몇몇 장면으로 환원되지 않는 ‘내공’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 칸의 수상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아뿔싸! 미리 봐두었어야 하는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한편, 그저 막연한 예감이 적중하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역사 속에서 철학적 물음 던진 <가게무샤>의 힘

그러고 보면 이번 수상은 이전의 국제 영화제 수상들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한국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눈길을 끈 것은 대부분 ‘동양적인 것’이라든가 ‘토착적인 것’이라든가 하는 특정 계열에 한해서였다.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조선의 미’라든가 ‘전통의 신비’ 따위가 구미 이방인들에게 주목될 때의 그 낯설음이란! <올드 보이>는 그런 식으로 전통을 분식하는 ‘오리엔탈리즘’에 포획되지 않고도 국제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의 약진은 실로 놀라워 수백만 관객 동원은 기본이고, 잘만 하면 천만 관객을 넘기는 시대다. 무엇보다 영상을 다루는 테크닉과 감각 수준에서는 구미와의 격차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올드 보이>의 수상은 한국 영화가 거뜬히 구미와의 감각적 동시성을 확보했음을 내외에 선포한 사건인 셈이다.

그래서 말인데, 영화 팬이자 고전 평론가로서 나는 한국 영화가 이제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가게무샤>가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영웅 다케다 신겐과 그의 ‘그림자 무사’를 다룬 이 영화는 미장센이나 스펙터클 측면에서도 기막히지만, 무엇보다 오래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첨예한 철학적 물음을 구성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사유의 편폭은 여전히 협소한 실정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나 고전적 사유를 다루는 영화는 거의 드물다. 간혹 역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있기는 하나 지나치게 무겁거나 아니면 가볍게 소재만 취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문학적 구도 내에서는 영상과 역사, 영상과 고전이 만나는 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길이란 없는 법, 누군가 발을 내디디면 그때부터 길이 되는 것 아닌가.

<올드 보이>를 통해 구미적인 감각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면, 앞으로는 좀더 긴 호흡으로 ‘오래된 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내는 작업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난만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에게 삶의 긴 호흡을 부여하고 충혈된 눈으로 심연을 응시하도록 하는 것, 이제 영화가 그 몫을 담당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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