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위해 줄 것은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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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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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과 북한의 수교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면, 정부는 근시안적 태도를 버리고 교차 승인을 염두에 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북한·미국·일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식량난에 허덕여온 북한이 최근 일본에 쌀 원조를 요청한 데 대해 일본은 내심 싫지 않은 반응이다. 그런가 하면 콸라룸푸르의 미·북한 핵 협상에서 북한측이 ‘합의’가 이뤄졌다고 발표하자마자 미국 대표 2명이 지난주 서울을 다녀갔다.

북한은 지난 3월 일본 연립여당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쌀 잉여분을 파악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이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시점에서 쌀 원조 문제를 꺼낸 것은 절박한 식량난말고도 다른 계산이 있는 것 같다. 즉 북한은 경수로 협상의 타결 국면에 맞춰 일본에 쌀 원조 카드를 내보임으로써 현재 교착 국면에 빠진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쌀 원조 및 경수로 문제에 관한 한 북한의 전략은 철저하게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런 의도를 알면서도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그저 관련 우방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을 따름이다. 쌀 문제만 하더라도 정부는 북한에 당국간 접촉을 통해 원조하겠다는 뜻을 공식 제의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먼저 북한에 쌀을 제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종전처럼 명분을 중시한 발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백% 존중해 주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의 우방이라도 자국의 이해에 따라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 문제의 경우 미국은 본질적으로 이 문제를 세계적인 핵 확산 방지 전략 차원에서 다루어 왔다. 따라서 북한이 기존의 핵 동결 약속을 지키는 한 미국은 경수로 협상에서 북한이 어떤 요구를 하든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자세를 취해 왔다.

이에 반해 한국은 북한 핵 문제를 민족 내부 문제로 파악하고 경수로 제공을 계기로 남북 대화 재개 등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총력을 쏟아 왔다. 한국이 40억달러나 되는 엄청난 경수로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선 것도 남북 교류라는 부수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어떤가. 지난해 10월 미·북한 제네바 합의문에는 경수로 협상 진전에 따라 남북 대화를 재개한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북한의 무관심 속에 남북 대화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과 미·일 밀착에 제동 걸 필요 없다


정부는 과거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을 통해 미국과 일본 등 우리의 우방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특히 정부가 지난해 10월 미·북한 제네바 합의문을 인정한 것은 국제 사회에 의한 북한 개방 노력을 지지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개방을 찬성하면서도 한국 정부는 미·일 양국이 북한과 밀착하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남북 대화 등의 조건을 내밀며 제동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중성은 현실적으로 국내 정치적 요인을 고려해야 하는 정부의 처지에서 볼 때 수긍할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날 대북 관계에서 민족적인 명분만을 내세웠을 때 득보다 실이 많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인정한 이상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놓고 너무 초조해 하거나 조바심을 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를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계기로 삼을 줄 아는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또 ‘흡수 통일 불가’ 원칙이 확고하다면 우방들의 대북 관계 개선을 통해 궁극적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함으로써 체제 변화를 이끌어 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미·일과 북한의 수교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면, 정부는 쌀이나 경수로 문제 등 개별 사안이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근시안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교차 승인 국면까지를 염두에 둔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북 전략상 지킬 원칙은 지키되 실익 없는 명분은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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