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쪽팔리아''의 긴데쿤타 이야기
  • 김영민 (한일신학대 교수·철학) ()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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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지식인들은 정신문화적 주체성과 자생성을 외치며 ‘한국어 패권주의’를 경계한다. 하지만 주둔 한국군의 범죄는 담 넘는 구렁이처럼 은폐되고, 태극기를 불태우면 국가안정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는 나라
내이름은 긴데쿤타, 서른다섯 살, 아프리카 동안(東岸)의 작은 나라 쪽팔리아 출신 유학생으로,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의 끝마무리를 하고 있다.

내 학위 논문은 ‘퇴계(1501-1570)의 <자성록(自省錄)> 문체(文體)와 그의 몸무게 사이의 상관관계 연구’이다. 퇴계를 다룬 글들은 쪽팔리아에서 출판된 것들만 수천을 헤아리지만, 그의 체중과 문체 사이의 관계를 심신상관적 기법을 통해 규명한 것은 처음이어서 이곳에서도 화제다. 그 어렵다는 한국어와 한국 고전 문학의 벽을 뚫고, 그것도 한국 문학 연구의 본산인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근 10년 만에라도 석·박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기회가 줄기는 했지만, 고전 문학 학위자는 희소한 데다, 세계 최고의 서울대 출신이라면 아직은 쉽게 통한다.

고향의 부모님들도 지난해에 별 준비 없이 전통 주막을 열었다가 때마침 인근에서 급속히 번진, ‘서울 찍고 전주’ ‘여의도 블루스’ ‘세종대왕과 전두환’ 따위 이름을 단 ‘순한국식’ 단란주점 때문에 초장에는 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상호(商號)를 ‘다팔리아’(내 고향 도시)에서 ‘소양강 처녀’로 바꾸면서 슬슬 매상이 올랐고, 김혜수·전도연 등 한국 여배우의 브로마이드를 벽지처럼 사방에 붙이고 우리 민요 대신 한국 가요를 깔았더니 당일부터 주당들이 문전성시란다.

알찬 유학이 되려면 텍스트 연구 이외에도 이른바 ‘거주와 참여’를 통한 비교 문화 체험도 중요한 법, 나는 내 삶의 정신문화적 자산과 지표가 될 한국 체류의 경험을 선용하던 중,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다. 알다시피, 고국에서는 ‘제1차 근대화 치돌(馳突) 계획’(1961)과 세계화한 단기(檀紀) 사용(1961) 이후, 전통을 청산한다는 기치 아래 한국식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와중에 쪽팔리아 전통옷일랑 전근대의 유물로 ‘쪽팔려’ 하고, 누구나 ‘고전 한복’을 국민복인 양 고집하며 즐긴다. 그러나 한국인은 지금에사 오히려 우리 옛옷을 연상시키는 ‘개량 한복’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고추장과 된장이 최고의 소스로 대접받아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비롯해서 뭇 음식에 남용되는 추세이지만, 이곳 서울, 특히 젊은층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퇴박당하는 분위기라는 사실 등등.

아버지의 전언에 의하면, ‘소양강 처녀’를 찾는 손님들이 즐기는 술은 여전히 ‘막걸리 2000’ 등 (세계화한) 한국산 민속주이고, 여기에서는 한물 간 이미자·나훈아·조용필이 물리지 않고 여전히 소비되는 추세란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영화 <쉬리>가 쪽팔리아에서도 히트하자, 우후죽순처럼 생긴 한국산 민물고기 수입상들이 국내산 유사 물고기를 염색 조작한 후 쉬리니 배가사리니 하고 판매하다가 박살 났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한국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 긴다존데는 한국어 조기교육령에 따라 정식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지만, 원래 ‘영재 한국어 교실’ 출신으로서 네 살부터 한국어 회화 테이프를 귀에 달고 다녔다. 이런 사정은 근자 고국에서는 일반화한 모양이다. 대학생들조차 번듯한 쪽팔리아어로 편지 한 장 쓰기를 변비 든 놈 뒷심 쓰듯 하지만, 한국어 열풍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다. 조기 유학붐은 이미 중학생층에 이르고, 유학에 필수인 토클(Tokfl) 시험만으로 한 해 수백억원이 새나간다고 한다.

고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정신문화적 주체성과 자생성을 외치며 ‘한국어 패권주의’를 경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라디오에서는 새벽 6시부터 ‘가요 한국어’가 전국민을 깨우고, 주둔 한국군의 범죄는 담 넘는 구렁이처럼 은폐되고, 국적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악용해 고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도한(渡韓)해서 출산하려는 쪽팔리아인 잉부(孕婦)들이 날로 늘고, 심지어 태극기를 불태우면 ‘국가안정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는 나라에서 그 노력이 무슨 실효를 얻을 것인가. 어쨌든, 나는 곧 귀국해서 모교인 ‘쪽팔리아 국립대학’에서 한국 고전 문학 강의를 맡는다. 한국이 내게 무엇인지, 나는 귀국을 앞두고서야 전에 없던 고민에 휩싸인다. (이 글은 젊은 철학자 탁석산이 얼마 전 <열린 지성>에 쓴 짧은 논문의 아이디어에 힘입었다) (jajay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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