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우리 사회의 리더십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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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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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계에서 일고 있는 세대 교체 바람은 도덕적이고도 사회 구조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그 갈등의 분수령으로 4월 총선은 다가오고 있다.” 경영 대권 인수 인계:정계와 재계에 세대 교체 바람이 거세다. 현대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5·18 관련 핵심 인물들에 대한 기소 결정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리더십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의 해체와 연동되어서 재계의 상층부에서는 상속과 승계에 의한 총수 교체가 진행중이고, 기업 내부의 지휘 계통에서도 리엔지니어링이라는 구조 개편으로 늙은 고위 직급자들이 대거 현업 부서를 떠났거나 퇴사하였으며, 젊은 중간 관리층의 지휘 재량권은 정책 결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 작업의 성격에 따라, 정치적 리더십의 해체는 구조적이고도 원리적인 바탕을 획득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정략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처럼 정략적으로 해체되어가는 정치적 리더십을 재편성하는 원리로 이 사회에 제시되어 있는 방안은 우선 ‘세대 교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인구층이 해마다 두터워지고 선거 때마다 엄청난 숫자의 젊은이들이 유권자층으로 진입함에 따라 세대 교체는 매우 현실성 있는 리더십 재편성의 방안으로 목소리를 키워 나갈 것이다.

지금 늙은 연배의 리더십이 부정되거나 도전 받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젊은 유권자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인구 비례적 현상 때문이라기 보다는 늙은 리더십의 본질 안에 더 이상 권위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기 어렵게 된 시대사적 배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늙은 연배의 권위는 흔히 역사의 고난에 동참하거나 거기에 개입해온 생애의 체험과 그 체험에 바탕한 미래 지향 능력에서 발생할 수 있다. 많은 기성세대들은 한국 현대사가 결정적으로 비틀려 가는 위기에서 다만 개인의 사적인 생애 속에 안주해왔다. 그러한 기성세대의 연륜과 경험이 젊은 세대의 눈에는 다만 몰가치한 생존술로 비쳐지기도 한다. 장유유서는 자연의 순리에 부응하려는 동양의 지순한 인간 질서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죽고 형해만이 완강하게 고착된 장유유서가 연공 서열의 위계를 구축하면서 사회의 민주적·기능적 발전에 장애가 되어온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대기업 내부에서 늙은 리더십의 퇴진은 상당 부분이 기능적 도태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들은 생산성 제고와 능률화의 목표를 향해 매우 전투적인 양상으로 격변해 가고 있는 기업 환경을 수용하거나 거기에 맞게 자신을 전환시킬 수 없었던 이른바 ‘구닥다리’인 셈이다. 세대 교체 목소리는 이처럼 도덕적이고도 사회 구조적인 갈등을 증폭시켜가고 있고, 4월 총선은 그 갈등의 정치적 분수령으로서 다가오고 있다.

크고 당당하게 늙어가는 지도자 보고 싶다

한 사회가 정보산업화·세계화 등 경쟁력 강화의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하더라도, 그처럼 강력한 경쟁력이 충만한 사회가 인간이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의 총체적인 결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 수많은 경쟁의 요소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직하는가의 문제에서 늙은 리더십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쟁력이 많은 행복을 보장해주는 무기라 하더라도, 그 무기를 획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의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방향성을 다음 세대에게 무리없이 전달함으로써 역사의 지속성을 견지해나가는 데서 늙은 리더십은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고, 목도리의 한 자락을 외투의 등 뒤로 돌린 김영삼 대통령의 활보는 매우 젊어 보인다. 지난 연말께, 생일을 맞은 김대중·김종필 두 지도자는 자신들의 70 나이에 대해 계면쩍어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70 나이에도 그들은 여전히 ‘젊음’에 관하여 말했고, 아직도 살아 있는 자신의 젊음을 과시하려 했다. 왜 그들은 늙음의 힘을 당당하게 과시하지 못하는가. 젊음을 과시함으로써 ‘교체’의 운명을 피해나갈 일이 아니라, 늙은 리더십의 본질적 힘에 도달함으로써 교체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은 선거 전략상 불리한 것인가. 크고 당당하게 늙어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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