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삶] 23년 만에 조국 찾은 재일 동포 작가 이회성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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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환갑을 맞은 재일 동포 작가 이회성씨는 무덤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11월3~4일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출발 전 23년 만의 조국 방문 준비로 분주한데도 천안 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옛 친구 묘지에 뿌릴 양주 한 병을 여행 가방에 챙겼다. 11월7일 오전 이씨와 함께 충남 천안 공원묘지를 찾은 이들은, 80년대 옛 서독에서 강연자와 유학생 신분으로 만났던 정범구씨(정치학 박사)·강정숙씨(독일 뮌헨 시장 외국인 담당 보좌역), 그리고 묘지의 주인공인 고 김길순 박사의 형 김희순씨와 누이 김영자씨였다.

묘소에 술을 뿌리고 절하고 난 뒤 이회성씨는 “김길순씨는 이해 타산이 티끌만큼도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67년 독일 유학을 떠나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김길순 박사는, 89년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고국에 돌아와 92년 간경화증으로 타계했다.

이회성씨가 김박사의 묘소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인 것은, 두 사람 모두 한국 정부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망명자’였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82년 독일에서 한국학술연구원(KOFO)을 창립한 김박사는, 83년부터 여러 차례 이회성씨를 강연자로 초청했고, 이씨는 그곳에서 ‘조국의 의미’를 새롭게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학술연구원은 80년대 독일에 살던 한국 지식인과 유학생 들이 모여 며칠씩 토론을 벌이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문제를 독일에 가서 배웠다. 80년대 한국학술연구원의 유학생 모임은 우리나라의 연장이었다”고 이회성씨는 말했다. 재일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한 72년, 한국일보사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은 이후 한번도 한국을 찾지 못한 그는 독일의 유학생 사회에서 조국의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씨의 조국 방문이 20여 년이나 지연된 것은 유신 정권 때부터 시작된 군사 정부에 대한 그의 강력한 항의에 연유한다. 73년 김대중씨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아사히 신문>에 <서울 파시즘의 겨울>이라는 글을 기고했고, 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김지하 시인 구속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오에 겐자부로(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등과 더불어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며 이에 항거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의 민주주의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그는 단순하게 그 시절을 회고했으나, 일본에서 벌인 그의 활동은 20년이 넘도록 조국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고, 이후 그가 조국의 상황에 대해 강도 높은 발언을 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조총련에서 일하다 모순 느껴 탈퇴

이씨의 고향은 사할린이다.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20년대 말 일본에 노동 품을 팔러간 그의 아버지는 사할린에까지 흘러들었고, 그곳에서 3남2녀를 낳았다. 셋째인 이회성씨는 47년 봄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에서 ‘도망나왔다’.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소련군의 일원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사할린으로 들어온 조선 사람 가운데 비밀 경찰이 있었고, 그들은 ‘계급과 민족의 적’을 시베리아로 보내는 일을 했다. “일제 시대 일본 협력 단체인 ‘협화회’ 부위원장을 지냈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굉장히 겁을 먹었다”고 이회성씨는 말했다.

이회성씨는 홋카이도의 삿포로 시에 생활 터전을 잡았으나 친지를 사할린에 버리고 나온 죄의식에 늘 시달렸다. 더구나 계모가 데리고 온 누이를 떼어놓고 왔다는 사실은 그에게 평생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가 되어 있다. 81년 사할린을 처음 방문해 누이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올 여름에도 일본 NHK와 함께 사할린을 찾아 누이와 상봉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나 그가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사할린 탈출’을 부분적으로 끼워넣은 소설 <유역>에서 그는 아버지를 ‘그 사람’으로 일관되게 표현하리만큼 누이와 친척과 이웃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삿포로 시에서 부모와 함께 돼지를 치며 고교 시절까지 보낸 이씨는 어느새 사회주의자로 변해버린 아버지로부터 ‘반쪽발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조선인을 싫어해 학교에 가서도 조선인 신분을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 문제에 눈을 뜬 것은 와세다 대학 러시아문학과에 입학한 56년께부터였다. 동포 학생들이 찾아와 유학생운동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자, 그는 조총련 소속 유학생동맹에 참여해 전국적인 조직을 통해 ‘민족 주체 세우기’같은 운동을 펼쳐나갔다.

당시 그가 휴학을 하면서까지 적극 참여한 운동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귀국(북송)운동’이었다. 59년 12월부터 1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조국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한다’는 희망을 품고 귀국선(북송선)에 올랐다. 그도 그 배를 타려고 했으나 ‘남아서 일하라’는 조직의 지시로 대학 졸업 후 조총련 중앙교육부에서 학생 대책을 담당했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로 일자리를 옮겨 4년을 더 일한 그는 67년 1월1일 조직을 빠져 나왔다. <조선신보>에서 중대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을 열심히 하든 안하든 돈이 나오는, 경쟁이 없는 사회주의의 내부 모순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국적 취득 심각히 고려할 터”

조총련을 탈퇴한 그는 잡지 편집자와 작은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2년 동안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 처녀작 <다시 돌아가는 길>로 69년 문학 월간지 <群像>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할린에 두고온 친척과 누이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그의 첫 작품은 그 이후 그의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열두 살 어린 시절에 각인된, 친척과 이웃을 버리고 떠나 왔다는 ‘공범자 의식’은, 민족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게 하는 원죄 의식으로 작용했다.

조국의 바깥에서 유랑하는 삶들에 대한 이회성씨의 문제 의식은 그의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지고 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다듬이질 하는 여인>(72)은 사할린으로 이주해온 어머니 집안의 고단한 삶을, <유역>(92)은 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백년 동안의 나그네>(94)는 47년 사할린에서 도망쳐온 한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사할린 시절부터 설움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와서 민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국 땅에도 못가고 객지에 묻힌 사람들을,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그 나라 정부로부터도 남북한 정부로부터도 소외 당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삶이 현실 문제와 언제나 부딪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삶을 검증하기 위해서도, 인간으로서 해결 못하는 고뇌와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작품을 쓰게 되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조총련 조직을 나온 사람들이 거의 모두 민단으로 가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과 달리 그는 지금도 ‘조선’이라는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군사 정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유명무실화한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보여 왔던 그가 선택을 유보한 이유는 스스로를 ‘망명자’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일종의 망명자여야 한다. 망명자의 길은 가장 어려운 길이지만, 어떤 말이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망명자의 위치를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무이시킨 공작의 ‘시대에 대한 고통의 감명도’라는 말에 비유했다. 망명자의 처지에 서야 남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남의 고통을 아는 사람일수록 인간이 갖는 기쁨과 설움에 대한 ‘감명도’와 ‘감수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일 동포 사회에서 민중문화운동을 벌이고, <民濤>라는 ‘민중 문예지’를 창간해 민족과 재일 동포, 해외에 사는 한인들의 상관 관계를 천착해오던 그는,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너무 늦었구나’ 하는 점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제서야 우리나라를 찾아와 나는 큰 손해를 본 것 같다. 더 빨리 와서 내 눈으로 보고 느낄 자유가 있었더라면 어떤 소설을 썼을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시대를 ‘고백론이 필요한 때’라 본다. “민족 통일이요 뭐요 하기 전에 여러 정황으로 보아 자기를 돌이켜보며 속죄하고 훌륭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것을 안하다 보니 뭔가 가슴에 걸리고, 고 김길순 박사처럼 평가 받아야 할 사람이 소외 당하는 일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운동권 지식인들에게 ‘이제는 북한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요구한다. ‘반공 풍토에 이용당할까 봐 말을 삼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그가 이번 방문에서 새삼스럽게 느낀 사실이다. “이제 이런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이곳의 운동권 지식인들도 북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번 귀국을 계기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볼 참이라고 했다. 슬하에 둔 3형제가 망명자와 비슷한 생활을 한 아버지 때문에 ‘우리나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고, 성인이 된 지금도 여러 모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자주 시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큰 소리를 지르고, 왁자하게 웃어대며 떠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접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나라의 토지가 갖고 있는 냄새를 온몸으로 감촉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금단의 땅>:이회성씨가 76년부터 3년에 걸쳐 쓴 전 3권으로 된 장편이다.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70년대 유신독재 아래 벌어진 각종 정치 사건과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88년 이호철·김석희 씨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지식인과 대학생 사이에 널리 읽혔다.<유역>:<금단의 땅> 뒤 10여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재일 작가 두 사람이 카자흐공화국 작가동맹의 초청을 받고 옛 소련을 방문하여 한 달 동안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중심 줄거리로 하고 있다. <유역>에서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삶에 ‘민족·인류’라는 작가의 평생 화두와 80년대 작가의 삶이 교차되고 있다.<백년 동안의 나그네>:94년 재일 외국인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노마(野間)문학상’을 수상했고, 일본 평론가 10인이 뽑은 ‘94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된 작품이다. ‘사할린 탈출’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민족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넘어서서 인간 자체의 문제로 나아간 장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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