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공동체 문화의 ‘부재 증명’ 노래방
  • 김성기 (서울대 강사·사회학)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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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은 노래에 대한 자신감뿐만 아니라 자기 표출 욕구를 한껏 발산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일상의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소통하고 새로운 자아를 모색하는 작은 움직임들이다.”
도대체 노래 못하는 사람이 없다.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만 보아도 그렇다. 예전과 달리 출연자들의 노래 솜씨가 뛰어나고 제스처 또한 당당하다. 자기 표현이나 과시 자체가 억눌려온 저간의 풍속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이런 변화 추이 한가운데 노래방이 자리한다. 그것은 편의점과 더불어 대중 문화에 새 풍속을 만들어 가고 있다. 노래방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노래에 대한 자신감뿐만 아니라 자기 표출 욕구를 한껏 발산하게 한다.

그 날도 그랬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술안주 삼아 이런저런 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시들해지자 곧바로 직행한 곳이 노래방이었다. 아래로는 신세대와 위로는 기성세대 사이에 끼여 위축될 대로 위축된 30대 중반 동창들에게 노래방은 일종의 문화 해방구였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싶을 정도다.

흔히 ‘건전한’ 10대가 갈곳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로는 ‘비교적 건전하려고 애쓰는’ 30대도 마찬가지다. 세칭 먹자골목에서 진창 먹고 줄창 마시고 나면 끝이다. 놀이 문화가 빈곤하다는 지적은 정말 맞는 말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우리들 중 누군가 <옥경이>를 선창한다. 사방에 선남선녀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아홉 개의 격자 화면에는 같은 그림이 비치고 있다. 잠시 후 음료수와 과일 안주와 패스포트가 들어온다.

열락의 천국인가, 카오스의 카니발인가

파도 치는 부둣가의 <부산 갈매기>가 ‘너는 나를 정녕 잊었나’하며 애틋한 감정을 자아냄에 따라 분위기는 점점 고양된다. 서양인 남녀가 골프를 치며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배경 화면 위로 노랫말이 줄줄이 떠오르고 지워진다. 목이 메일 때까지 계속된 우리들의 노랫가락은 이미 한밤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어디였던가. 열락의 천국, 아니면 카오스의 카니발?

세월이 흘러 가정을 갖고 또 일용할 양식을 벌 터전을 잡느라 다소 기가 꺾인 우리들이지만 ‘같은 문’을 나왔다는 인연 하나로 모이고, 또 극심한 경쟁 사회 속에 이만큼 버텨온 서로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위안도 갖게 된다. 그래서 30대에게 동창 모임은 소중한 것이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늘 돈 문제를 의식해야 했으며 지금도 자유롭게 쓸 만한 여력이 없는 30대로서는, 그들만의 정서적 유대 공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마저도 종국에는 노래방 문화에 의탁하지 않으면 안되리만큼 독자적 문화를 꾸리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이 땅에서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나름의 생생한 경험이 없지는 않으리라. 미디어가 제공하는 어떤 문화적 경험보다도 한 수 위인 ‘진정한’ 문화적 경험을 적잖게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경험이 자꾸 미디어 문화의 강력한 자력에 휩쓸려 힘없이 퇴색해 버리고 마는 것 같다.

놀이마저 타율적 문화 공간에 복속돼

요컨대 노래방은 진공흡입기로 빨아들이듯 우리의 감성을 순전한 기분 전환의 세계로 밀어넣으며, 우리의 문화 공간을 쾌락주의적 소우주로 변형 응축시킨다. 그것이 갖는 오락성 때문에 사람들은 노래방이 일으키는 역기능을 눈감아 주고 있거나, 아니면 감수하려 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유쾌한 신민’의 모습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어떤 대처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문화의 시대’다.

우리 국민이 한 해 동안 노래방에다 바친 금액은 2조원에 달한다. 이처럼 노래방은 경제에도 큰 파급 효과를 미친다. 2조원이 얼마나 되는지 실감하기는 어렵지만 이른바 ‘5천억원’보다도 큰 것임은 분명하다. 각종 문화산업이 고부가가치의 원천으로 각광 받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문화산업의 양적 규모 자체가 우리 문화 수준의 향상을 가리키는 지표로 당연시되어서는 안 되리라. 중요한 것은 일상의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소통하고 새로운 자아를 모색하는 작은 움직임들이다.

자생적 공동체 문화가 없어서 생긴 빈 자리를 매체 의존적인 서비스 문화가 나꿔채고 있다. 논다는 것마저도 놀이방 같은 타율적 문화 공간에 복속되는 것이다. 대중 문화가 번창한다지만 대개는 상품화한 유희문화일 뿐이다. 그런 문화는 현실과 무관한 자기 탐닉의 세계를 펼치고, 그 속에서 우리는 파국적 충격에 얼고 환상적 유희로 달래진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아,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어!’하고 뇌까린다. 과연 무엇을 즐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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