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와 제도를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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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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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검찰과 국회와 헌법재판소와 현행법과 현행 제도 전체를 무력화하면서, 다만 자신의 정치적 권능을 강화했다.”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12·12 및 5·18 관련자의 헌법 파괴 범죄를 사법적으로 정리하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돌연한 입장은 그 나무랄 데 없는 도덕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향한 순정(純正)하고도 절실한 광정(匡正)의 외침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사태는 검찰이 해석하듯이 ‘성공한 쿠데타’이기 때문에 정치적 환경이 전환되지 않고는 사법적 재단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의 질곡 속에서 15년이 흘렀고, 그동안 한국 사회는 이 사태의 사법적 재단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환경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크고 작은 가능성들을 축적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치른 희생과 고통은 심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돌연한 입장 표명과 이에 따른 여권의 대응은, 대통령을 포함한 집권 세력 전체가 이 문제의 민족적이고도 역사적인 본질을 방기하고 다만 권력 투쟁의 방편으로만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이 문제를 가장 정당하게 해결하는 길은 현행 검찰 제도와 법에 따라 5·18 관련자들이 기소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소가 이루어졌더라면, 문민의 정통성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을 것이며, 검찰과 정부조직 전체가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라는 암울한 이유를 내세우며 모든 공소권을 반납했다. 이같은 무력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정치적 가이드 라인이었다.

검찰이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 관계 앞에 주저앉아 버린 다음, 차선의 해결책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위헌 결정함으로써 재수사와 기소를 실현시키는 방식이었다. 이같은 방식의 기소가 이루어질 경우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 관계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겠지만, 행정부와 사법부는 견제와 균형의 아름답고도 긴장된 역사의 첫 장을 열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내막인지 대통령은 ‘위헌’ 결정 쪽으로 헌재의 내부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날 돌연 ‘특별법 제정’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 특별법을 제정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대통령은 국회의 사명과 기능을 존중하는 방식을 거부했다.

5·18 불기소 처분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절규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여망은 이미 야당에 의해 구체적으로 법안화되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이 법안이 국회에서 의회주의의 원칙에 따라 입안되는 과정을 대통령은 차단해 버린 것이다. 헌재의 헌법적 판단과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방침이 경쟁적으로 뒤섞여 있는 이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위헌 결정이 가져올 정치적 파괴력을 절묘하게도 비켜가면서 헌재의 결정을 결과적으로 무력화하고 있다.

우려되는 ‘정략적 처리’ 특검제 도입해야

결국 대통령은 검찰과 국회와 헌법재판소와 현행법과 현행 제도 전체를 무력화하면서, 다만 자신의 정치적 권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문제의 방향을 틀어놓았다. 여권 실력자들이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이미 기소할 범위를 실명으로 거론하고 있는 언동은 법과 국민을 모욕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과 여권의 이같은 태도는 12·12와 5·18에 대한 사법적 정리가 집권 세력의 정치적 통제 밑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예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5·18 불기소의 부당성에 대한 헌재의 판단은 한국 헌정 사상 가장 빛나는 사법의 권능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대통령의 ‘선수’에 의해 정치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대통령의 그같은 정치적 입장은 15년 전의 그 비극적 사태를 정리하는 과정과 절차에서 우리 사회의 사법기관과 헌법기관이 정당한 몫으로 참여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민주적 경험의 값진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역사와 민족의 문제를 정권 이해의 영역 안에 가두어 놓는 대통령의 태도가 계속되는 한 특별 검사를 요구하는 국민의 갈망은 정당한 것이다. 특검제를 반대하는 대통령의 입장 속에 특검제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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