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부산 국제영화제 화려한 개막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6.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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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21일 제1회 축제 열려…31개국 1백71편 참여, 아시아 작품이 주축
 
칸이 지구 어디쯤에 붙어 있는 도시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곳에서 유명한 국제 영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은 안다. 인구 7만명밖에 안되는 프랑스의 작은 휴양 도시는 그렇게 커 보인다.

부산. 인구 3백80만명, 한국의 최대 항구 도시인 이곳에서 드디어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꿈인 국제 영화제가 닻을 올린다. 1919년 〈의리적 구투〉가 제작된 이래 77년 만에 한국 영화계가 처음으로 내디디는 ‘거보’이다. 오는 9월 13∼21일 수영만 야외 상영관과 남포동 극장가에서 31개국의 필름 1백71편이 돌아간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주관 부산시)의 가장 큰 특징은 아시아 영화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영화를 아시아인이 앞장서서 활성화하자는 취지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줄곧 변방으로 치부되어 왔으나, 중국과 이란 영화의 선전(善戰)으로 아시아 영화는 최근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 받아가고 있다.

 
일곱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영


이번 영화제에서는 모두 일곱 가지 주제로 나누어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 주축은 아시아 영화이다.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아시아 감독들의 신작·화제작 열여덟 편을 엮은‘아시아 영화의 창’, 독창적인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작품 열세 편(한국 영화 세 편 포함)을 모은 ‘새로운 경향’ 부문은 순수한 아시아 영화들의 잔치다.

그밖에 △유럽·미주 지역 작품으로서 세계적으로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공인 받은 영화들로 구성된 ‘월드 시네마’ △각국의 걸작 단편·만화·기록 영화를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 △ 95년 9월∼96년 8월 제작된 한국 영화 화제작을 모은 ‘코리안 파노라마’ △80∼95년 한국 영화의 경향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엄선한 ‘한국 영화 회고전’이 있다. 이 영화들이 모두 남포동에 밀집한 극장가에서 상영된다. ‘특별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국내외 작품 일곱 편은 매일 저녁 7시30분 수영만 요트 경기장의 야외 상영관에서 상영된다. 이번 영화제 중 상금이 걸린 경쟁 부문은 ‘새로운 경향’(만달러)과 ‘와이드 앵글’(코리안 앵글, 월드 앵글 각각 만달러) 부문이다. 나머지 영화는 2002년까지 비경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30대 후반 영화인들이 수년 전부터 주도


국제 영화제는 단순한 영화 잔치가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 교수(부산예전)는, 영화제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쇼’쯤으로 생각하는 시민이 많아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영화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돈, 돈이다. 국제 영화제는 ‘국제 영화 시장’의 점잖은 표현이다. 숱한 영화 수입업자나 배급업자들이 자갈밭의 진주를 찾아 한탕하려고 일시에 몰려든다. 필름이 쉴새없이 돌아가는 극장 뒤켠에서는 제작업자와 배급업자가 동상이몽에 빠진다.

좋은 자국 영화가 출품되어야 영화제가 빛난다. 김지석 교수는 “90년대 들어 한국 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92년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 이후 프랑스·영국·독일·미국·호주 등 각국에서 한국 영화 주간을 마련하고 있다. 마치 80년대 중반 중국 영화가 세계 무대에 등장하던 과정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중심지인 서울이 아니고 부산에서 국제 영화제가 처음 열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공’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 영화제 견문이 풍부한 전문가에게 집행을 일임한 것이다. 서울에서 국제 영화제를 열려는 계획은 수년 전부터 문화체육부나 한국영화진흥공사도 입안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권과의 맥락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국제 영화제에 무관심한 영화계 기득권층에 의지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산은 달랐다. 이번 영화제를 주도한 김지석 교수(아시아 영화 담당)·이용관 교수(중앙대·한국 영화 담당)·전양준씨(유럽·미주 영화 담당) 등 패기에 찬 30대 후반 영화인들이 수년 전부터 국제 영화제를 준비해 왔다. 이들은 뜻을 펴지 못하다가 지난해 8월 ‘영화를 아는’ 관료 출신인 김동호 현 부산국제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손잡고 사업을 급진전시켰다.

이번에 출품된 외국 영화 대다수는 한국 극장가에서 ‘돈 주고도 볼 수 없던’ 것들이다. 눈여겨 보아야 할 작품은 역시 아시아 영화, 그 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영화는 이란 작품이다. 이란 영화는 80년대 후반부터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 세계가 알려지면서 세계 영화계의 눈길을 모아 왔다. 이번에 들어온 이란 영화는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서 <여행> (알리레자 라이시안 감독), ‘새로운 경향’ 부문에서 〈하얀 풍선〉(자파르 파나히 감독)·〈알 수 없는 상황〉(야스민 말렉 나스르 감독) 세 편이다.
이번에 출품되는 한국 영화들, 특히 ‘새로운 경향’에서 다른 아시아 영화들과 경합할 〈세 친구〉(임순례 감독)·〈유리〉(양윤호 감독)·〈시간은 오래 지속된다〉(김응수 감독)는 나름대로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다. 임순례 감독의 데뷔작 〈세 친구〉는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한 작품이다. 아마추어 연기자들을 주연으로 기용하여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의 아픔을 무리 없이 소화했는데, 얼마나 관심을 모을지 기대된다.

서구화·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대만 가족의 불행과 이로 인해 좌절을 거듭하는 젊은이를 그린 〈아청〉(창초치 감독)은 대만 영화의 현 수준을 보여준다. 김지석 교수는 이 작품이 근래 보기 드물게 드라마적으로 탄탄한 걸작이라고 평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고통스러워하는 젊은이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사라져 가는 대만 본토인의 정신에 대한 감독의 문제 의식이 번뜩인다는 것이다.

가린 누그로호 감독(인도네시아)의 〈달의 춤〉도 빠뜨릴 수 없는 영화이다. 전혀 다른 환경의 두 젊은 남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으면서 세계 영화계에 인도네시아 영화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충격적인 영상으로 일본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쓰가모토 신야 감독의 〈동경의 주먹〉, 소시민 부부의 정신적 방황을 탁월한 심리 묘사로 풀어낸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의 〈오카에리〉는 이번에 못 보면 다시 볼 날을 기약하기 힘든 작품이다.

월드 시네마에서는 최고 수준의 유럽·미주 예술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전양준씨는 특히 테오 앙겔스풀로스 감독(그리스)의 작품을 두 편이나 들여왔다. 〈율리시스의 시선〉과 〈안개 속의 풍경〉이 그것이다. 앙겔스풀로스 감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에 비견되는 거장이지만 한국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월드 시네마에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미국 영화 〈크래쉬〉(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가 가장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동차를 충돌시켜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변태 성욕자들을 통해 문명 세계를 신랄히 풍자한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영상이 충격적이어서 일각에서는 칸 영화제 그랑프리감이었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에는 출품한 아시아 영화 감독들이 대거 내한해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과 토론회도 갖는다. 〈호도문〉의 슈케이 (홍콩), 〈아청〉의 창초치 등 아시아 감독 20여 명이 부산을 찾는다. ‘얼굴 마담’ 격으로 첸카이거나 장이모 등 중국의 거장들도 부산을 찾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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