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벌 구조 조정, 실천이 중요하다
  •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1998.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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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경제팀과 금융권은 노·사·정 합의의 대전제인 재벌 개혁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재벌의 미온적인 개혁 움직임에 대한 사회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신탁 이후 국민 대다수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회생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데 반해, 경제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재벌의 개혁 태도는 지극히 방어적이고 요식 행위에 그치고 있다는 인식이다.

지난 2월14일 비상경제대책위(비대위)에 제출한 26개 재벌의 구조 조정 계획안을 대하는 여론도 싸늘하기 짝이 없다. 이 계획안은 주력 기업 선정, 그룹 총수의 책임 경영, 회장실과 기획조정실 단계적 폐지, 상호 지급 보증 해소, 결합 재무제표 작성 등 개혁의 핵심 사항을 나름으로 언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인 실천 계획은 찾아보기 어렵고, 김대중 차기 대통령측과 이미 합의한 원론의 테두리만 맴돌고 있다.

비대위가 현재는 서슬 푸르게 개혁을 독촉하고 있지만,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사라질 한시적 기구이므로, 우선 면피성 구조 조정안을 내놓고 반응을 탐지하며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 아닌가 싶다. 지난 두 달 동안 재벌은 총수 사재 출연, 빅딜, 회장실·기조실 폐지 등 개혁 카드가 제시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난색을 드러냈고, 역으로 결합 재무제표 작성을 연결 재무제표로 대체해 달라, 상호 지급 보증 채무를 신용 보증 채무로 전환해 달라고 목청을 높여 왔다.
대선 직후 김대중 차기 대통령과 4대 그룹 총수가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사렸던 재벌들이 시간이 갈수록 문어발식 경영과 총수의 전횡이 가능했던 재벌 체제의 기득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단 저항의 몸짓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총수 개인 자산 출자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고, 빅딜은 실속 없이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다. 경영의 투명성과 대주주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한 소액 주주 권한 강화도 자꾸 뒷걸음치고 있다. 재계의 로비와 치밀한 반격에 의해 새 정권의 개혁 의지가 차츰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새 정권과 재계는 만일 재벌 구조 개혁이 유야무야할 경우에 노동계의 극한 저항과 민심 폭발이 일어나고, 가까스로 이룩한 노·사·정 대합의가 송두리째 무너질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외국 금융기관과 기업 들도 구조 조정 상황을 지켜보며 돈주머니를 풀까 말까 매만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직면한 경제 현실에는 다시 한번 눈 가리고 아웅할 여유가 없다.

재벌은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철저히 이행해야

물론 구체적인 재벌의 구조조정안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낱낱이 일반에 공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한시적 기구인 비대위가 개혁의 세부안까지 완벽하게 정리해 차기 정부에 넘길 수 있을 만큼 단련된 기구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 1월 13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이 4대 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 개혁 방안의 5개 원칙을 이끌어낸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비대위가 이 원칙을 재론하는 수준의 구조 조정 계획을 얻어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재벌의 저항 논리가 거셈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도 비대위는 재벌의 계획안을 두고 ‘노조가 정리 해고를 수용하듯이 기업들도 기업 개혁 의사를 확실히 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이러한 계획안이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대위가 이 달 말까지 재벌들에게 주거래 은행과 맺도록 강제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약정에는 연차적인 부채 비율 감축 계획, 계열사 통폐합과 사업 축소 등 상당히 세밀한 재벌의 자구 노력 방안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주거래 은행은 이러한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챙기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대출금을 회수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의 건실도를 은행이 평가하는 자율 금융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마땅히 재벌 구조 개혁의 지속성을 감시할 수 있는 금융권의 제도적 구속력이 보장되어야 하며, 새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법제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새 정부의 경제팀과 금융권은 핵심 과제이자 노·사·정 합의의 대전제인 재벌 개혁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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