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문화 시대, 기틀을 다져가자
  • 편집국 ()
  • 승인 1996.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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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라는 권리와 검열이라는 의무는 언제나 긴장 관계이다. 이 권리와 의무 사이를 문화적·민주적으로 디자인하지 못하면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수 없다.”
 
단세 글자가 바뀌는 데 무려 63년이 걸렸다고 한 대중음악 평론가는 감개무량해 했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비법) 제17조(심의) 2항의 ‘받아야 한다’가 ‘받을 수 있다’로 바뀐 것이다. 이 술어의 주어는 `‘판매·배포·대여 등의 목적으로 음악을 제작하거나 수입 또는 반입 추천을 받고자 하는 자’이고, 그 목적어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 심의이다.

33년 조선총독부 경무부가 실시한 레코드 취체(단속) 검열 규칙에서 시작된 음반 사전 검열은 미군정과 건국, 그리고 공화국이 몇번 바뀌는 사이에도 변하지 않은 ‘가위손’이었다. 70년대의 김민기와 신중현, 80년대의 운동권과 정태춘·박은옥, 90년대 서태지와아이들의 노래들은 저 연대(年代)들에 대한 저항이자, 그 반문화성에 대한 알리바이였다.

지난해 12월7일, 사전 심의를 폐지한 음비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된 이후 6개월이 지나, 마침내 법적 효력이 개시되기 시작한 지난 6월7일, 서울대에서는 이날부터 3일 동안 ‘열린 음악회’가 열렸다. 정태춘 박은옥(113쪽 기사 참조) 강산에 안치환 양희은 장사익 천지인 꽃다지 크레쉬 조동진 넥스트 신성우 등 록과 민중 음악 계열 대중 가수들이 한 무대에서 손을 잡은 것이다. ‘자유’ 무대에 함께 오른 가수들은 김민기·신중현의 후예들이었으니, 저마다 공륜 사전 심의라는 지뢰밭을 포복해온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자유’ 콘서트는 행진곡만은 아니었다. 그 무대 뒤에서 “그동안 사전 심의 앞에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살아왔다”는 한 록가수의 고백이 있었거니와, ‘자유’ 콘서트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앞날에 대한 두려운 각오가 겹쳐 있었다. 그 두려움의 하나가, 대중 가수들 ‘내부의 검열관’은 앞으로도 당분간 존재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군사 정권 시대를 통과해온 예술가·언론인 들이 그러했듯이 내부의 검열관을 퇴치하고 드넓은 상상력의 바다로 나아가는 일은 이제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몫인 것이다. 또 다른 두려움은, ‘핑계’(사전 심의)가 없어진 만큼 대중 음악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더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다.

88년 연극대본 사전 심의가 폐지되고 이번에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 심의가 폐지되면서 표현의 자유가 새로운 차원을 맞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사전 심의는 아직 남아 있다. 이번 ‘자유’ 콘서트를 가장 부러워한 이는 영화인들이다. 영화는 아직도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93년 영화 사전 심의와 관련해 헌법 소원을 제기한 영화인들은 이번 ‘자유’ 콘서트에 박수를 보내면서 ‘영화에 자유를, 가위에 재갈을’이라는 슬로건을 더욱 높이 내걸었다.

국가보안법 조항 등 ‘반문화의 덫’도 걷어내야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가 철폐된다면, 표현의 자유는 ‘진화’ 할 것인가. 문화예술계의 응답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우선, 공연윤리위원회가 실존하고 있고, 직권 심의라는 사후 심의 제도를 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함을 지목한다. 지난 5월, 4백만부가 팔린 소설 <태백산맥>이 ‘대한참전단체연합회’ 등에 의해 출판 중단 요구를 받았으며, 94년 제도권 음악 활동을 시작한 ‘꽃다지’ 대표(이은진)가 지난 3월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대중 문화 계간지 <리뷰>(96 여름호)는 음반 사전 심의제 철폐를 계기로 ‘검열 제도’ 전반에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검열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관료적인 문화 행정과 시대착오적인 정신적 봉건주의가 야합하고 있는 한국형 검열에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표현의 자유라는 (개인의) ‘권리’와 검열이라는 (국가 혹은 사회의) ‘의무’는 언제나 긴장 관계이다. ‘자유’는 저 권리와 의무 사이로 난 위태로운 길을 닦으며 여기까지 도달했고, 또 앞으로도 그 험난한 길을 타고 전진할 것인데, 이 권리와 의무 사이의 권력적 길항을 문화적·민주적으로 디자인하지 못하는 한, 21세기 문화의 시대는 ‘끝없이 유예되는 미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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