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과 남의 고통
  • 이재현(문학 평론가) ()
  • 승인 2004.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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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 수업을 거부하던 고등학생이 제적당했다. 종교적 독단과 배타성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학교측이 제적당한 학생의 아픔에 민감해진다면 제적은 철회될 수 있다.”
 
최근 채플 수업을 거부하던 고등학교 학생을 학교가 제적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 동대문구 ㅁ고 3학년 강의석군은 지난달부터 예배를 거부하고 수업이 끝난 뒤 1시간 동안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학교측의 고심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강군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종교가 없는 다른 모든 학생과 관련된 일이고, 다른 학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학교측은 강군의 항의에 대해 전학을 권유하고, 전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적하겠다고 이미 통보해둔 터였다.

고교평준화 제도에서는 학생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서 학교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채플 수업과 같은 종교 활동이 강제로 실시되어서는 안된다. 또, 학교 성적이 대학 진학을 좌우하는 한 예배 참석을 성적에 반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립 학교를 세운 분들의 건학 이념이 애당초 선교에 뜻이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종교 교육과 활동은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 자율적이고도 선택적으로 수행되어야 옳다. 그런데 강군의 학교에서는 매주 학년 전체가 참석하는 예배뿐만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또 학급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게다가 학교측은 기말고사를 치르던 강군을 불러내 제적 통보를 했다고 한다.

“학교가 학생을 마녀처럼 화형한 셈”

학생을 제적한다는 것은 학생을 죽이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강군이 전학했으면 될 것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미 한 학기를 거의 마쳐 가는 고등학교 3학년에게 전학하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애당초 강군에게는 학교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얼마 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성공회 박경조 신부님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종교의 토대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라며 매우 인상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을 잃으면 사회나 개인은 병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또 이것으로부터 기독교 안에서의 일치운동이나 타종교와의 대화 및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나는 믿고 있는 종교가 없을 뿐더러, 굳이 강조해 말한다면 ‘모태 무신앙’이다. 그렇지만 박신부님 같은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성당이나 사찰에 가고 싶어진다.

강군을 제적한 학교의 조처는 박신부가 애써 비판하는 종교적 독단과 배타성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명박 시장의 표현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학교는 ‘마녀’ 강군을 화형함으로써 학교를 봉헌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이라크 전쟁의 실질적 전범인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광기도 다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해 종교적 천년왕국을 세우려 한다는 것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처지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영적인 기능과 활동은 인간의 정신 영역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정 종교가 말하는 구원이나 해탈의 이념에 굳이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치쯤은 우리가 자신의 내적 세계를 차분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통찰할 수 있다. 가려 있달 뿐이지 사람은 모두 거룩한 빛을 지닌 존재이자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영적 내공이 약한 나로서는 박신부님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만이 아니라 뭇 생명을 살리는’ 수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 더구나 그것도 종교적 이유로 해서 이러저러하게 체계적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에는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종교적 전통이 있다. 그러니 학교측은 강군의 제적 조처를 철회하기 바란다. 강군의 아픔에 민감해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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