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힘 들어간 예술영화 전용관
  • 신수정 문학 평론가 ()
  • 승인 2001.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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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와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제목만 보고 지레 짐작하지 말기 바란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10분간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는 이 영화는 벨기에·룩셈부르크·스위스·프랑스가 공동 제작한 것으로 이른바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는 '예술 영화'의 하나였다. 물론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황폐한 지방 문화의 희생양인 그 친구 덕분이었다. 이 아줌마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야반 도주'를 감행하며 서울로, 서울로 상경해 왔다.

그리하여, (예술)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는 있으나 (예술)영화를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여자와, 상대적으로 (예술)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영화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던 여자, 간단히 말해, (예술)영화와는 무언가 조금 엇갈리는 듯한 두 여인네가 드디어 예술 영화 전용관에 입성하게 되었다.

수소문 끝에 그 영화관이 광화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헛짓·헛수고·허탕에 대해서는 나의 무지를 탓하면 그만이다. 도무지 영화관 따위가 있을 성싶지 않아 보이는 빌딩 내부와 근엄한 수위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찾기 애매한 입구, 쌀쌀맞기 그지없는 매표소 아가씨도 척박한 비즈니스의 세계에 '예술'을 심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언가 고압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딴 게 아니다. 무언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겉돌게 하며, 평소 하던 행동, 이를테면 큰소리로 웃는다든가, 코를 푼다든가, 하품을 한다든가, 요기를 하기 위해 빵을 먹는다든가 등등의 행위를 왠지 망설이게 하고, 눈치를 보게 하는 일련의 분위기를 말한다. 그 팔 할은 두 여인네의 자질 부족에서 연유한 것일 터이다. 대부분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다른 관객들은 조금 달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훌륭했다. '러브 어페어'라는 용어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는 할리우드의 뻔뻔함에 모름지기 사랑은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라고 일갈하는 그 전복적 도발성은 분명 그들의 문화적 자신감과 오랜 인문학적 전통을 새삼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어깨의 힘을 다 빼고 '성'을 둘러싼 우리의 허위와 위선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이 영화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함께 웃을 수 있는 대목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관객들은 근엄하고 진지하기만 했다. 웃는 순간 삼류 포르노물이 된다는 강박, 이 영화는 예술이라는 자부, 이렇게 고상한 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고 웃으면 안 된다는 확신, 이런 것들이 가뜩이나 난방이 잘 안 된 실내를 더욱 썰렁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중간에 자리 뜬 아저씨들'로 추억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삼색 시리즈의 키에슬로브스키 감독 작품이 처음으로 상영된 허리우드 극장에는 제목만 보고 모여든 '요상한' 아저씨들이 모두 중간에 자리를 뜨는 바람에 소란이 그치지를 않았다. 분명 그 영화에 대한 옳은 대접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키에슬로브스키도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자기 영화가 사랑을 많이 받기를 원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에게 그 영화는 그 아저씨들과 함께 추억된다. 그 추억이 있기에 우리의, 아니 나의 고상함과 예술에 관한 열정도 완성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네마 천국> 식의 이탈리아식 가설 극장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완전히 게토화한 예술 영화 전용관은 자칫 '예술'을 '생활'과 분리시킬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도 어렵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가장 끔찍해 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들은 예술의 제도화, 예술의 박제화는 예술의 고사를 부추긴다는 점을 강조했다.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라는 영화도 예전처럼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더라면 더 많은 관객을 불러모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가 예술 애호가가 아니면 또 어떤가. 지금 우리의 예술 전용 영화관은 아방가르디즘 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호암아트홀이 영화관으로서 팥소 없는 찐빵이 된 데는 상영되는 영화의 '후짐'뿐만 아니라 그것이 뿜어내는 예술가연하는 '아니꼬움'이 한몫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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