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나라' 일본을 두려워하랴
  • 탁석산 한국외대 강사·철학 ()
  • 승인 2001.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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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변하고 있다. 겉으로는 우익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밑으로는 보통 국가를 추구하고 있다. 오자와가 표현한 대로 보통 나라가 되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면 이웃으로서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즉각 일본이 우익화하고 있으며 군국주의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 되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가 태평양전쟁 전범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전범을 떠받드는 것은 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조짐이고, 일본의 우경화는 결국 과거의 침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려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이 전범이라는 평가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범이란, 사전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켰거나 전쟁으로 죄를 지은 자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쟁 중 반인간적 범죄를 저질렀다면 전범이 될 것이다. 사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동남아시아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을 많이 범했다. 따라서 전범으로 판정하는 것이 옳다. 이런 기준이라면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 즉 반인간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기준에 의해 미국도 전범이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는가? 그것은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했지만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도 베트남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군대 보유에 제한을 받지 않고, 베트남 전몰 군인에 헌화해도 아무런 항의를 받지 않고 있다. 이유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즉 미국은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이었고 베트남전쟁 후에도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기 때문이다. 역시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해석인 모양이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국립 묘지' 기능 떼내면 참배 시비 사라질 것


일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태평양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예우해야 한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군인을 예우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데 일본의 문제는 국립 묘지와 신사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겹쳐 있다는 것이다. 신사 중에서도 특히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야스쿠니 신사가 메이지 정부 수립 전후의 사망자부터 태평양전쟁 사망자까지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도에서 종교적 기능을 제외하고 황실의 신도식 제사를 국가 제사로 확립하였는데, 이것이 국가 신도이고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신도의 산물이다. 즉 야스쿠니 신사는 국립 묘지이면서 동시에 국가적 신사이다. 그리고 국가적 신사는 곧바로 천황으로 연결되므로 군국주의의 망령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문제가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국립 묘지 기능을 떼어냄으로써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신도에서 종교적 기능이 떨어져 나가 국가 신도가 되었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국립 묘지의 성격이 떨어져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야스쿠니 신사는 시비에서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일각에서 국립 묘지를 만들자는 안이 나왔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일본은 변하고 있다. 겉으로는 우익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밑으로는 보통 국가를 추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보통 국가와 마찬가지로 군대도 갖고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을 국가 차원에서 떳떳이 예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웃으로서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패전 후 50년 이상이 지났고 1997년 일·미 방위 신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어 일본은 미국의 동의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오자와가 표현한 대로 '보통 나라'가 되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면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보통 국가가 된다면 천황의 역할도 변하고 축소될 것이다.


사실 메이지 유신 무렵 일본인 대부분은 천황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갑자기 등장한 천황이 그동안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환경이 바뀐다면 천황의 역할도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평범한 신사로 변하여 지금도 간혹 볼 수 있는 것처럼 결혼식장으로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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