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쳐 버린 '빅 게임'
  • 박순철 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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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꾼 돈을 모두 갚았지만 그것으로 IMF 사태가 남긴 과제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 보편적 윤리와 보편적 법치를 확립하는 일은 계속 숙제로 남아 있다."




택시 기사들의 불친절이 경기의 체감지표같이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경기와 친절은 대개 반비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택시 기사들의 친절이 정착하자 이 어설픈 공식은 효력을 잃었다. 서비스산업에서 고객에 대한 봉사가 기본이라면, 이제 택시산업은 기본을 세운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전체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성장기의 한국 경제로서는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는 성년 의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외환 위기의 고통이 사회 전체를 가격했다고 한다면, 그 고통의 크기에 걸맞은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당연했다.


충격과 경제 변화의 이치를 실감 나게 풀어쓴 책으로 일본의 경제 관리 하라다 유타카와 고사치 유타카가 함께 쓴 〈일본 경제 발전의 빅 게임〉이 있다.


저자들은 '지대(地代)'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땅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데 따라 지대가 발생하듯 후진 사회의 권력은 특정인에게 독점적 특혜를 제공해 일종의 지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권력 지대'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상적인 이윤 추구 활동 대신에 권력을 통한 지대 추구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이 땅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아 온 현상이다.


이런 왜곡된 구조에서는 정치 권력이나 행정 권력으로부터 특혜를 얻는 것이 신제품 개발이나 경영 합리화보다 더 중요해진다. 실력 쌓기보다 인맥 만들기가 중시되니, 인맥의 중요한 터전인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광기 어린 경쟁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지대 추구 사회를 해체해 이윤 추구 사회로 바꾸어 놓는 큰 사건이 '빅 게임'이다. 전쟁·내란·혁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저자들은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과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개혁이라는 두 차례 빅 게임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일본 경제의 경이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분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IMF 사태야말로 우리 경제의 빅 게임이 될 수 있었다. 한 세대 전 가공무역형 공업화가 시작된 이래 누적된 왜곡의 구조들을 뜯어고쳐 교육 과열과 부정한 경쟁에서 소모되는 엄청난 에너지들이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 마당에서 마음껏 발휘되도록 대수술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 기회는 무산되었다.


지역 감정에 안주할 때 치러야 할 대가


돌이켜보면 IMF 사태는 외환 위기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3고(高)로 국제 경쟁력이 허물어진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국제적 신뢰가 무너진 것이었다. 몇십 년 동안 정경유착이 키워 온 분식 관행과 불투명성은 천문학적인 돈과 정보가 광속으로 움직이는 세계화 시대에는 스스로 판 묘혈로 작용할 뿐이었다. 이를 사전에 단호히 뜯어고치지 못한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마비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지난 8월23일 우리는 국제통화기금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고통을 단지 외환 위기라고 규정한다면 빚을 갚는 것으로 계산은 끝난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이 외환이나 경제 운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면, 그 인과의 조감도를 선명한 필치로 그려내 사회적 합의로 정립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치적·정신적 부패의 핵심 사슬 가운데 지역 감정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 감정은 정치를 불구로 만들고 불구의 정치는 다시 경제를 불구로 만든다. 지역 감정에 안주할 때 치러야 할 비용은 결국 일자리 상실이고 복지를 희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대문 안에만 윤리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 전근대적 원근법을 고집할 때 초래되는 도덕적 파편화에 대해 위험한 수준의 불감증이 만연하고 있다. 신문 탈세 사건을 언론 탄압이라고 분장하는 논점 일탈의 오류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보편적 윤리와 보편적 법치를 확립하는 일이야말로 IMF 사태가 제공할 수 있었던 빅 게임이었다.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하지만 빅 게임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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