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칼과 '네트 전쟁'
  • 박순철 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1.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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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번 작전을 잠정적으로 '무한 정의'라고 명명했다지만, 그것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예고하는 불길한 예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주 뉴욕발 인천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이 가해진 뒤 불투명해진 비행기 일정 때문에 언제 귀국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날이 흘렀기 때문이다.


기내식을 받고 냅킨을 풀었을 때 그 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칼이 나왔다. 그것은 냅킨에 함께 쌓여 있던 묵직한 스테인리스 포크나 스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스틱 칼은 대참사 이후의 혼란과 불안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직유(直喩)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현실에 대한 대응의 어떤 한계를 상징하고 있었다. 추가적인 안전 조처에 필요한 비용과 그에 따른 안전 증가에는 일종의 체감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용은 급격히 늘어나지만 위험은 거의 줄어들지 않는 점근선(漸近線)의 궤적이 엄존한다.


언제 어디를 어떻게 겨냥할지 알 수 없는 테러에 대한 방어적 조처에는 이처럼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누가 적인지 전모가 분명하지 않은 마당에 특정한 테러리스트 집단에 대한 군사 공격이 크게 효과가 있을 것인가? 이 혼란스런 시점에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전쟁의 성격과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다.


전쟁의 성격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테러리즘 전문가인 미국 존 아퀼라 교수의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네트 전쟁(netwa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테러리스트 집단과 같은 비(非)국가 행위자들이 초(超)국가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이머지 새천년〉 2000년 12월호, 존 아퀼라 외 〈정보 시대의 테러리즘〉 참고).


이 네트워크는 전통적인 국가 조직과 달리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며, 거기에는 어떤 유일하고 중심적인 리더십이나 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관료주의적 명령이나 통제보다 모든 멤버들이 신봉하고 공유하는 원칙이나 이념이 중요하다.


아퀼라 교수는 특히 테러리스트 네트 전쟁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예로 오사마 빈 라덴의 아랍아프간(Arab Afghans) 활동을 들고 있다. 그는 이렇게 본다. "빈 라덴은 아랍아프간 테러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노드(네트워크 내의 한 점을 이루는 인물·차량·사무소·컴퓨터 등)이지만, 이 네트워크는 그의 개입이나 리더십 또는 자금 지원 없이도 많은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설령 그가 죽거나 사로잡히더라도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미국이 빈 라덴을 죽이거나 사로잡더라도 네트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이번 작전을 잠정적으로 '무한 정의(Infinite Justice)'라고 명명했다지만, 그것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예고하는 불길한 예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이런 성격 분석보다 더욱 중요한 제2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정당성 문제이다. 이에 관해 나는 영국의 코맥 머피-오코너 추기경이 제시한 조건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군사적 행동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만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거기에는 세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군사적 대응이 악을 억제하는지 아니면 더 큰 악을 유발하는지에 관한 '비례의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죄 있는 자와 무고한 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군사적 행동이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빈 라덴의 혐의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큰 군대를 일으키고 있다. 어쩌면 미국은 승리하기도 정당화하기도 어려운 전쟁 속으로 지나치게 성급히 뛰어들고 있는지 모른다.


테러리즘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미국에 필요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역(戰域)에 대한 무력 증강보다는 정당성 강화인 것 같다. 원칙과 이념이 씨줄과 날줄이 되는 네트 전쟁 시대에 정의는 어느 때보다 실제적 의미를 갖는다. '평화는 정의의 과일'이라는 명제도 이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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