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은 아름답다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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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서울 시내에서 노점이 사라진다고 한다. 큰 경기를 허술히 치러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약자들의 눈물 속에 잔칫상을 마련해서는 안된다."




퇴근길에 전철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저절로 눈길이 가는 데가 있다. 역사 앞 떡볶이와 튀김을 파는 음식 리어카들이다. 주위에는 늘 손님들이 둘러서서 북적댄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스산해지는 풍경에 조금은 온기를 보태 준다.


그런데 내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외관과 위생 문제로 서울 시내에서 길거리 떡볶이와 어묵이 사라진다고 한다. 어딘지 서운하다. 월드컵이 7개월 정도 앞으로 바짝 다가왔고 20억 명이 지켜볼 큰 행사를 허술히 치러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네 일상적 삶의 모습마저 수치스럽게 여겨 가면서 외국 손님들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가?


각 사회는 그 나름으로 비교 우위가 있는 법이다. 속성 사진을 찍듯 모범 시민을 양산하겠다는 포부는 곤란하다. 근본적으로 변화할 의지가 없다면 현재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이는 쪽이 오히려 낫다. 우리는 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라는 말을 하고 살지 않았던가? 그 '우리 것'을 너무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20년 전 방콕에서 살 때 들었던 이야기가 한 가지 기억난다. 공무로 싱가포르를 며칠 들렀던 친구가 다음 일정인 방콕에 찾아왔다. 그는 싱가포르가 깨끗하고 질서가 잡혔지만 숨이 막힌다고 하면서, 방콕은 지저분하지만 사람 사는 도시 같다고 했다. 어쩌면 그 두 도시 이야기에서 일본과 우리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데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야 한다. 무색무취한 사회가 있다면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남대문시장이 인기 있는 것은, 그곳에 상품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대문시장이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노천 카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유럽 노천 카페의 아시아판이 음식 노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는 열린 공간과 열린 만남이 있다. 외국인으로서는 서민들의 삶 속에 섞여 들어가 보는 독특한 경험을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태국 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태국의 명물인 쌀국수를 좋아한다. 그런데 쌀국수는 길가에 차린 싸구려 음식 리어카에서 먹어야 제맛이 난다. 좁은 식탁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기우뚱거리는 의자에 앉아 먹을 때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삶의 풍부한 경험이 된다. 큰길가이든 골목길이든 도처에 늘어서 있는 음식 노점들은 겉보기에 별로 위생적이 아니지만, 그런 데서 음식을 먹고 탈이 난 기억은 없다.


인간의 얼굴을 한 월드컵 대회를 치르자


올해 우리는 '한국 방문의 해'라고 수선을 떨며 관광객 모으기에 애썼으나 1년의 3분의 2가 지난 8월 말까지 외국인 관광객 숫자는 3백50만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태국을 찾은 관광객 수는 지난 몇 년 동안 매년 10% 정도씩 늘어났고, 드디어 올해는 천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노점상 수와 관광객 수는 반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월드컵 대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0년쯤 전 당시 방콕 시장이던 잠롱 씨를 인터뷰한 기억이 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통행에 크게 지장이 있는 육교 근처 등을 제외하고는 노점을 널리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 새벽 출근하기 전에 청소부들을 찾아 선물을 나누어 주며 방콕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려고 애썼던 그였지만, 외관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었다.


이제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축제에는 순수한 환락과 기쁨 외에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태를 상정하는 환상의 요소가 그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상투성의 질곡에 매어 있었다. 상투성은 노점이 감추어야 할 치부라고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 노점은 아름답다. 노점은 삶이 가장 정직하게 노출된 건강한 현장이다. 무엇보다 약자들의 눈물 속에 잔칫상을 마련하면 안된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패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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