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바다에서 내 아이 구하기
  • 이성욱(문화비평가) (dasaner@hanmail.net)
  • 승인 200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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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포르노와 동의어로 생각하는 청소년들 앞에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차단과 금지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성과 포르노 혹은 포르노적 성과 비포르노적 성 사이의 분별력, 그리고 그 환경에서의 생존력을 키워 주는 것이다."




혹 느지막한 저녁에 이번 호를 읽고 계신 분이 있다면, 조금 비겁한 일이기는 하되, 소리 안 나게 아들 방 문을 열어 보시라! 잠겨 있다면, 십중팔구 당신 아들은 포르노 사이트를 서핑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들 컴퓨터의 '즐겨 찾기' 항목을 검색해 보시라! 모르긴 몰라도 열에 서넛은 역시 포르노 사이트가 찍혀 나올 것이다. 그럼 이제 당신은 어쩔 셈인가? 스스로를 '이해심' 많은 아버지라고 위로하는 분이라면 자식이 어느덧 성 문제를 고민하게 된 나이가 된 데에, 자신의 청소년기를 회상하면서 색다른 감개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개는 아주 자족적일 가능성이 짙다. 당신이 청소년기에 접촉한 성 관련 매체는 마분지 소설이었고, 영상 춘화라는 것도 기껏해야 여자 나체 정도거나, 이른바 '하드코어' 포르노라고 해도 그 조악한 영상처럼 유치한 것이었다. 또 당시 그런 매체와 접촉하는 아이들은 수적으로 소수였고, 나아가 그런 접촉은 아이들에게 비일상적인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청소년들의 성적 매체는 그 표현에서 당신의 경험 이력 수십 길 위이며, 또 성은 아이들에게 모험도 비일상적인 것도, 혹은 동경과 신비스러움의 거처도 무엇도 아니다.


일전 14∼15세 아이들이 불법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그 컨텐츠를 '팔아먹다가'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 보도는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들이 유별난 아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포르노 사이트와 청소년들의 접촉 빈도는 막대한 시장 형성력이 되어 가고 있다. 아이들은 얘나 쟤나 포르노 사이트 관련 아르바이트를 한다. 구속된 아이들처럼 사이트 하나를 개설해 포르노 컨텐츠를 올려놓으면 조회수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구멍은 산재해 있다. 더 많은 호객을 위해서, 더 세고 더 화끈하고 더 엽기적인 텍스트를 올려놓는다.


여기에도 전형적인 시장 논리가 적용된다. 그렇기에 바로 열네 살밖에 안된 아이가 화간·계간·수간·강간·딜도어 SM·본디지·컴셧·로리타·헨타이 등등(이런 용어들이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당신이라면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당신의 아이들은 이 용어를 오래 전부터 일상의 양식으로 삼고 살아 가기 때문이다)을 사이버 쇼윈도에 올려놓고 오늘도 또래 아이들을 호객하는 것이다.


채팅 사이트에서 청소년들의 커뮤니케이션은, 아줌마 아저씨 들의 전화방 폰 섹스처럼 촌스럽지 않다. 과감하고 용맹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청소년기 특유의 치기대로 아이들은 컴퓨터 카메라 앞에서 옷을 걷어붙인다. 그리고 카메라 저쪽에 앉아 있는 파트너에게 온몸 구석구석을, 심지어 자신들의 성행위를 보여주는 라이브 쇼를 예사로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성은 성인들의 손을 떠난 독립 조계지


청소년들의 성은 이미 한국 성인들의 손을 떠나 있는 독립 조계지이다.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당신, 문득 아들이 나날이 서핑하는 그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소싯적에 춘화 속을 헤엄쳤다고 자부하던 당신도 그 표현의 노골성이나 엽기성에 경악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아이에게 그런 표현물은 이미 덤덤한 기호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런 기호로 표시되는 성은 다만 '사용'하면 될 어떤 것일 뿐이다. 마치 거리 농구 한판 하듯이.


사태의 심각성을 만각(晩覺)한 당신이 포르노 사이트를 소탕하자며 아무리 목울대를 세워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완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보기에, 음란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부 어른들의 주장은 세상 물정 모르는 불출의 행동인 것이다. 진공관에 가두지 않는 한 포르노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방도는 이제 전혀 없다. 그러면? 답은 나와 있다. 성을 모두 포르노와 동의어로 생각하는 청소년 정서의 이 가속적 황폐성 앞에서 어른들이 절박하게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차단과 금지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성과 포르노 혹은 포르노적 성과 비포르노적 성 사이의 분별력, 그리고 그 환경에서의 생존력을 키워 주는 것이다. 순수는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티 없는 멸균 정서가 아니라 비순수를 이길 수 있는 힘이라는 잠언이 여기에도 해당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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