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게스의 반지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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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론의 스크럼 속에 편입되는 순간 정치인 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추상화한 집단 의지만 남게된다. 어쩌면 당론의 정체(正體) 속에 무책임한,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나온다. 기게스라는 목동이 지진으로 갈라진 땅속에서 얻은 마법의 반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목동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돌려 보았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 도덕적일 수 있는가라는 것이 이 우화의 화자인 글라우콘이 제기한 의문이었다.


기게스의 경우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그는 새로 얻은 초능력을 이용해 왕비를 유혹했고 드디어 국왕을 시해해 권력을 잡았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타인의 눈 때문이며 감시가 사라질 때 부도덕이 판친다는 주장은 적어도 오늘날 우리 정치의 현실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부합된다.


한국 정치는 여러 가지 형상으로 마법의 반지를 생산해 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당론'이라는 이름의 장막이었다. 당론의 스크럼 속에 편입되는 순간 정치인 각 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추상화한 집단 의지만 남는 것이다. 얼굴 없는 정치인은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책임도 함께 소멸된다. 어쩌면 당론의 정체(正體) 속에 무책임한,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명분 없는 '당론 독재' 이제는 벗어날 때


우선 배경 그림부터 살펴보면, 우리 정치 마당의 한 모서리씩을 차지하는 국민·국회의원·지역 보스의 세 주역 가운데 국민과 국회의원은 지극히 무력하다는 것이 유감스런 현실이다. 투표권이 힘의 원천인 국민은 지역 감정에 의한 경직적인 투표를 통해 지역 보스들에게 실질적으로 주권을 양도했고, 국회의원은 정치 생명을 걸지 않는 한 공천권을 행사하는 보스의 의사를 거스르기 어려운 위치로 떨어졌다는 것이 정치를 옥죄는 답답한 구도다. 이런 보스 천하의 현실에서 그 지배를 일상적으로 정당화해 온 장치가 당론이다.


그런데 당론이 당원과 국민에 대해 떳떳한 명분이 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근대적인 정당의 존재이고, 둘은 당론이 민주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다. 정당의 교과서적 정의는 '국민 사회의 정치 통합의 실질적인 조직 매개체로서 동일한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 과정의 통제, 특히 정권의 획득·유지를 통해서 그 정견을 실현시키려는 자주적·계속적인 조직 단체'이다(이극찬 지음 〈정치학〉 참조).


우리의 대표적인 정당들 가운데 이런 정의를 충족시키는 정당이 과연 존재하는가? 정치 지도자들이 편의에 따라 만들고 허물기를 거듭해온 정당, 정치인들이 눈앞의 이해를 좇아 입당과 탈당을 거듭해온 정당에서 동일한 정견이니 계속성이니 하는 특성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이다. 여러 해 전의 베스트 셀러 이름을 흉내 낸다면 이 땅에 '정당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 정치가 앓고 있는 병의 더 깊은 뿌리가 드러난다.


떳떳한 정당이 없다면 떳떳한 당론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당론이 없다면 당론의 독재도 없어야 마땅하다. 또 '정당이 없다'는 이 다소 난폭한 명제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면 우리 정치가 지루한 '당쟁'의 수렁을 벗어나 바르게 발전할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실천적 해법도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국민과 매스컴은 여당과 야당의 힘겨루기나 그 무의미한 주장들보다는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견해와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이름 없는 초선 의원이라도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헌법기관에 걸맞은 라임라이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국회의원들이 보스의 시선을 등지고 국민이 지켜 보는 밝은 무대 위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때 대의 정치의 본뜻도 살아나게 된다. 그럴 때 이 정치의 황무지에도 국민이 주인인 참다운 정당의 싹이 돋아날 수 있다.


사회는 날로 투명한 가치를 선호하는데 정치만 영원히 안개 속의 고도(孤島)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어쩌면 임금의 자리를 찬탈한 목동의 우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벌거벗은 임금의 이야기가 아울러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제 집단적인 최면에 마비되지 않은 어린이의 순진한 눈으로 오래된 허구들을 바라볼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지 낀 손가락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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