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변화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1.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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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억은 슬라이드처럼 한 장면씩 단속적으로 나타난다. 2000년 3월 베트남의 왕도 후에를 찾았던 기억도 그렇다. 그 첫 장면에서 아내와 나는 배낭을 지고 시골 역사처럼 초라한 비행장을 나섰다.


두 번째 장면은 낡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40대 운전사는 라디오로 중계 방송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라디오에서 엄청난 함성이 울려 나왔다. 골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에어컨이 안 되어 열어 놓은 차창 밖에는 열대의 불볕 더위와 흙먼지의 매캐한 냄새, 그리고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라디오 속의 함성과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 같았다. 나의 편견이었다.


축구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열광의 역사였다. 나는 몇년 전 하버드 대학 영문학 교수가 쓴 <축구의 사회사>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폭력과 유혈로 점철된 역사였다. 14세기 런던 시장은 이 ‘아무 가치 없는 무익한 유희’를 금지해서 위반하는 자는 투옥하겠다고 위협한 일도 있었지만 민중의 열광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축구라는 야수를 사람들은 구획된 공간 안에 가둘 필요가 있었다. 경계선으로 나뉜 축구장 내부와 외부의 공간은 서로 다른 법칙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경계선 긋기’는 물론 축구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스포츠는 하나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단절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안식일의 단절, 라마단의 단절은 왜소한 인간에게 절대와 만날 수 있는 주기적인 변화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월드컵도 그렇다. 모든 축제는 환상이라는 신학자 하비 콕스의 해석을 빌리면, 월드컵은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기도 하다. 2002 월드컵이라는 환상 게임에서 우리가 꾸는 꿈은 단순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른바 ‘16강’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치지도 않고 되뇌는 이 만트라의 함축은 한마디로 과거와 달라지라는 것이다.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를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필요하다. 낡은 지혜를 포기하는 것과 새로운 비전을 확립하는 일이다.


우리는 시효가 지난 지혜를 너무 오래 간직해 왔다. 한국팀의 낡은 미신을 파악하는 데 히딩크 감독이라는 이방인의 눈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며칠 전 <축구 가족>이라는 소책자에서 읽은 어느 중국인 교수의 글은 우리 망막 위에 자리 잡은 더욱 큰 맹점을 상기시켰다.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축구 시합 자체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경기장 안팎의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과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한 데 있다.’


박정희 시대 철학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


한 번도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서본 적이 없는 나라 사람들이 생각난다. 아시아 지역 예선 10조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해 탈락한 베트남과 몽골·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 볼 시선이 생각난다. 어쩌면 우리는 ‘16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를 위해서는 공간적인 외부 못지 않게 시간적인 외부로 나가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의식적으로 두 발을 옮겨 딛기 전에는 20세기의 미신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20세기 후반을 지배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철학이었다. 절량 농가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잘 살아 보세’는 그 요체였다. 박정희씨는 그 폭권보다 훨씬 생명력이 긴 조야한 물질주의로 여전히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돈과 힘과 승리가 전부인 개발 시대의 정신적 유산을 여전히 움켜쥔 풍토에서 부패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변화는 아름답다. 누구 말대로 변화에는 일종의 구원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2002년은 무엇인가. 21세기 초엽에서 맞이하는 월드컵과 대선은 여전히 승리만이 전부인 게임인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랜드 비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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