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프로축구 리그를 열자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3.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러 해 전 일이다. 방콕의 우리 대사관에서 영국 여행객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중국으로 떠날 참인데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베이징-평양-서울-도쿄로 이어지는 여행을 계획했던 것 같았다.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도쿄-서울-베이징을 잇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동북아 방문 여정을 보면서 불현듯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한 가지 소박한 가설을 갖고 있다. 한 나라 내에서 생활권을 규정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원리가 지리적 원근이라면 국제 사회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도 결국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는 질량과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국가들의 공동체 형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일종의 ‘중력 가설’을 믿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질서에서 국토의 분단이 동시에 아시아 대륙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게 된 상황에서 우리는 동북아를 하나의 국제적 생활권으로 보는 시각 자체를 상실했다. 미국과 일본이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가 되면서 우리는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표류하는 고도(孤島)처럼 서쪽만 바라보았다. 역사로부터의 실향(失鄕)이었다.



‘지역 공동체 확대’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



그런데 국가 간의 무역 흐름은 GNP로 정의되는 경제 규모와 지리적 거리로 대표되는 무역 흐름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다. 이른바 ‘중력 모델’ 이론이다. 세계 3대 경제권의 하나로서 그 몸무게가 날로 무거워지는 동북아에서 역내 국가 간에 작용하는 인력은 갈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다.



시야를 지구 전체로 넓혀 보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일극체제(一極體制)에서도 지역 공동체 확대는 확고한 대세이다. 돈까지 하나로 합한 유럽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북미·남미·아프리카·동남아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역 동맹은 강화되고 있다. 동북아의 나라들은 이런 세계적 조류에서 배제된 예외적인 외토리들일 따름이다.



21세기에도 동북아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계속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지역도 이웃 나라들끼리 모여 ‘경제 공동체’를 묶어 가는 세계적인 큰 흐름, 메가 트렌드를 계속 거스를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대적 변화를 열어 가는 하나의 계기를 ‘스포츠 공동체’의 가능성에서 찾으면 어떨까?



나는 4년 전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뒤 동아시아 프로축구 리그를 제의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동북아 4개국의 여러 도시들이 하나의 국가 안에서처럼 통합 리그를 구성하자는 생각이었다. 광대한 미국과 캐나다가 하나의 메이저 리그를 운영하는데 이보다 좁은 동북아에서 그렇게 못할 지리적 이유는 없다. 처음에는 한·일 2개국 리그로 시작해 3개국, 4개국으로 점차 넓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쓰럽게 월드컵 16강 같은 목표에 매달리는 대신 축구를 느긋하게 즐기면서도 기량은 축구 선진국 수준으로 상승시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주말마다 서울·대구·광주에 평양·도쿄·상하이 팀이 찾아와 경기를 벌인다면 그 반응이 어떻겠는가? 시즌이 끝날 때 1부 리그에서 성적이 나쁜 도시를 2부 리그로 떨어뜨린다면 동북아 모든 대도시들의 축구장은 주말마다 축구 열기로 들뜰 것이 분명하다.



동북아를 지배하는 불신과 공포는 무엇보다 무지의 산물이다. 한국 선수들이 중국이나 일본 프로팀에서 뛰고 북한이나 일본 선수들이 한국의 프로팀에서 활약할 때 우리가 이웃 나라들에 대해 지녀 온 근거 없는 적의와 오해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악의 축’이 화제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직은 비현실적인 몽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몇천만 명이 희생된 상잔의 기억이 생생했던 전후 유럽에서도 프랑스의 장 모네는 유럽공동체라는 비전을 꿈꾸지 아니했던가? 어쩌면 도라산역의 단절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