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평-김영진.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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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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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알리에 주눅 들어 ‘갈지자걸음’- 김영진



<알리>를 연출한 마이클 만은 남자들의 얘기에 능하다. <히트> <인사이더>에서 남자들의 대결과 우정을 인상적으로 그렸던 마이클 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헤비급 복서이자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 홀로 맞섰던 알리의 삶을 여러 대결 구도로 펼친다. ‘<알리>는 말콤 X와의 우정과 결별, 조 프레이저와의 경쟁과 우정, 조지 포먼과의 운명적인 대결 등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고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알리를 둘러싼 사건들은 그냥 스쳐 흘러 지나간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모든 것이 알리의 내면 묘사에 묻혔다.


<알리>의 초반 10분은 숨이 막힌다. 캐시어스 클레이가 소니 리스턴을 누르고 챔피언에 오르는 1964년의 운명적인 시합 장면에 인종 차별이 일상에 만연했던 알리의 소년기와 청년기가 오버랩되면서 관객의 시선을 낚아챈다. 샘 쿡의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오>라는 노래가 깔리는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꿰는 알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마이클 만의 연출 초점은 바로 알리의 마음이다. 격동기의 미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스포츠 영웅이 되었던 알리의 위대한 내면에 감추어진 고독과 좌절과 용기를 담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다.



알리는 운동을 잘하는 흑인이었지만 백인의 영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백인의 종교인 기독교 대신 이슬람교를 택했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으며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고 흑인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그 순간부터 영화 <알리>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순교자 알리와 복싱 영웅 알리 사이의 묘사 축을 놓고 갈지자걸음이다. 마이클 만은 알리가 맞섰던 시대를 제대로 그려내지도, 그렇다고 그가 싸웠던 위대한 상대 복서를 세밀하게 묘사하지도 못했다.



이 영화는 알리의 내면을 파고들었지만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은 알리가 생애 곳곳에서 마주쳤던 멋진 호적수를 상대하는 장면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 미국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선이 굵은 <알리>는 알리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알리 자신의 내면의 물결을 균형감 있게 묘사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격정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영화는 때로 시적이며 종종 무아지경의 동일시를 불러일으키지만 알리의 실제 삶에 주눅 들어 그만 감동의 자극선을 놓치고 말았다.







느리게 다가오는
기묘한 감동 - 심영섭




마이클 만 감독은 ‘싸나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장기를 지닌 몇 안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영화를 ‘진짜 사나이 영화’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감독한 <히트>나 <인사이더>의 남자 주인공들이 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리면서도 세상과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우직한 사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화사하고 호들갑스런 남성 영웅주의 대신 정말 뼛속까지 저리게 만드는 고독한 남자들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그렇다면 복싱 역사상 가장 화려한 떠벌이 복서 알리와 진중한 마이클 만이 만나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알리>는 바로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을 한데 섞어 느리지만 기묘한 감동을 엮어 낸다.
영화는 위대한 미국의 흑인 가수인 샘 쿡의 에 맞추어 격렬하게 훈련하는 무하마드 알리의 주먹질 사이로 어린 시절을 스케치하며 시작한다. 흰 피부의 예수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어린 캐시어스 클레이. 흑인 전용 칸이 설치된 버스에 올라탄 그는 인종 차별이 유난히 심한 미국 남부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정상에 도전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부터 영광과 좌절로 점철되었던 알리의 10년을 묵묵히 뒤따른다.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쏜다’는 일성을 남겼던 소니 리스턴과의 일전. 카메라는 ‘떠벌이’ 알리를 오히려 침묵으로 잡아낸다. 마이클 만 감독은 복싱 경기가 단순한 구경거리가 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무게 중심을 잡는다. 리스턴과의 경기 장면 역시 어떤 속도의 변주도 없이 냉정한 자세를 일관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서서히 알리의 불안, 알리의 고독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고독이 말로 표현될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전반부에 알리의 혼돈감을 형상화하듯 격렬하게 흔들리던 카메라는 갈수록 느린 발걸음으로 알리의 내면을 맴돈다. 그의 혼란은 바로 백인 위주 사회에서 사는 흑인의 정체성 혼란과 맞물려 있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는 자신을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부른 상대편 선수를 난타하며 “내 이름이 무어냐”라고 몰아세운다. 흑인은 신의 스케줄에 끼어 있지도 않았다고 믿는 이 흑인 챔프에게 그래서 조지 포먼과의 ‘킨샤샤 대혈투’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포먼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염려를 뿌리치는 알리. 여기서부터 그를 담은 카메라는 몽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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