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과 색깔론
  • 안병찬(<시사저널>) 편집고문 ·경원대 신방과 ()
  • 승인 2002.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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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요일에 임진각으로 가는 1번 국도 통일로는 차량으로 만원이다. 곳곳에 전차 차단 시설과 금지 표시가 많아 ‘안보 도로’의 때를 벗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길이 남북 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울 외곽순환도로인 자유로가 행주대교에서 임진각까지 열린 것도 임진각과 판문점을 축으로 하는 관광산업 거점을 형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파주시가 이 달 말까지 임진각-도라산 일대를 월드컵 관광지로 조성하는 것도 그 계획의 하나이다.


지난주 당국은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 경의선 4.1km를 연장하여 개통했다. 그런데 당국자들은 도라산에 조지 부시가 다녀간 일을 좀 지나치다 싶게 강조한다. 우리로서는 천 년이 넘은 역사적 지명인 도라산으로 새로운 뜻을 새기기에 충분한데 말이다. 도라산 전망대는 1986년 9월에 세워졌다. 그 앞에는 냉기가 담긴 전진 부대장의 글이 남아 있다. ‘대통령 각하의 경륜을 받들어 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달래고 조국 통일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이 전망대를 세우다.’ 그 대신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이라는 구호가 괜찮다. 판문점 가는 길은 살벌한 대립감으로 점철된 길이었다.


재일교포 교수가 느낀 평양-판문점, 서울-판문점의 차이


일본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아시아 문화 강좌 주임 최길성 교수는 2년 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앞서 남북 판문점을 관광인류학적으로 비교한 일이 있다. 최교수는 평양 대외국동포영접부 제356차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통해 판문점을 다녀왔다. 평양에서 판문점까지 160㎞(자동차로 2시간 반)는 자동차를 볼 수 없는 고속도로이다. 북쪽 안내원이 남한을 나쁘게 말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미국놈들, 미군 철수, 팀스피리트 훈련, 협정 위반’ 등을 소리 높인다. ‘적대 의식’은 있고 긴장감은 없다. 정주영에 대해서는 “공화국 사람인데 잠시 남조선에 돈벌이 갔다”라고 소개한다.


그는 서울에서 판문점으로 가는 길 60㎞(자동차로 1시간)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표현했다. 관광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것은 대전차 장애물과 정지(stop), 출입금지(do not enter) 같은 통제판 들이다. 관광 안내인은 수시로 “미녀는 잡혀간다(기쁨조로)” “진바지를 입으면 안된다(미제국주의 옷이니까)” 따위 농으로 긴장감을 적당히 상품화한다. 이런 긴장감의 연장선에서 판문점 관광은 회담 장소, 자유의 다리, 도끼 사건 현장 등을 거친다.


최교수는 결론으로, 남쪽은 국가주의. 북쪽은 민족주의로 이질적 이념을 가졌으나, 고유한 문화와 주체성으로 남북이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어 경제적인 문제가 없다면 통일에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현장 답사를 했다고 전제하지만, 그런 인류학적 비교가 다소 기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 일간지의 표제는 대개 ‘울었다’로 끝을 맺는다. ‘서울도 평양도 울었다’ 아니면 ‘온 겨레가 울었다’이다. 왜 우는가. 기쁨보다 큰 아픔을 확인하는 울음이다. 그러니 천추유한을 푼 것이 아니다.


남북을 모두 울리는 상봉 드라마는 늙은이들이 중심에 선 통곡의 드라마이다. N세대는 어떤가. 나는 문화방송의 100분짜리 이산가족 상봉 특집을 대학생들에게 보여준 후 개방식 질문지를 주어 신세대가 이산가족의 만남을 어떤 주관성으로 인식하는가 가늠해 본 적이 있다. 어떤 학생은 생이별을 겪지 않았어도 그 아픔을 공유하여 통일 염원을 되새겼다고 썼다. ‘이 드라마는 정말 슬프다. 이 다큐는 눈물로 가득 차 있다’고 쓴 학생도 있다. 그저 ‘담담한 감동’을 전해준 다큐였다고 받아들인 친구도 있다.

가장 냉담한 학생은 ‘우리 20대 초반 청년들에게 이산가족의 아픔이란 이해는 하되 느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 같은 다큐는 자칫 소수에게만 어필하는 지나친 감상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썼다. 이처럼 3세대가 보이는 슬픔의 에너지는 농도가 묽다. 색깔론에 대한 감정도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대선 후보들이 벌이는 사상 논쟁이나 색깔 논쟁을 보면 현실적인 변화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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