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6·29’라는 선택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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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마다 빅터 웡 씨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싱가포르의 변호사다. 1999년 가을 나는 그를 만나 이 도시 국가가 아시아에서는 예외적으로 부패 척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좀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어떻게 법치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법치는 법이 모든 사람 위에 있을 때 성립된다. 무엇보다도 정치 권력이 법 아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싱가포르를 현대 국가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권력은 리콴유 전 총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웡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법치의 개념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그와 다른 아시아 지도자들과의 차이지요.”


그러면 리콴유는 어떻게 아시아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법치 이념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그건 그들 자신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큰 차이입니다.”
대통령의 아들들 일로 세상이 시끄럽다. 법치가 확립되지 않은 사회의 특징은 늘 시끄럽다는 것이다. 여야의 피곤한 설전은 그 일단이다. 그런데 법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는 이것이 대통령의 아들들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문제가 된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깨끗하지 않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뒤늦게나마 법치를 확립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임기 말인 데다 아들들의 문제가 걸려 있는데?


김대통령은 큰 개인적 시련에 직면해 있다. 김대통령 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물론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결정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김대통령은 침묵을 계속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그가 침묵을 깰 때 그것은 단순히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 또는 (어느 틈에 진부한 표현이 되어 버린)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하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신뢰를 되찾지 못할 때 그것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신뢰는 단순함에서 온다. 여기에서 6·29 선언은 하나의 선례가 된다. 그것은 각본과 연출의 무대였지만 정치적 위기 탈출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태를 극적으로 역전시켰다. 성공 요인은 간단했다. 국민의 요구를 아무 조건 없이 100% 다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김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허심탄회하게 헤아려 이를 100% 다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만일 그가 아들들의 결백을 믿는다면, 국민이 또는 야당이 요구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아무 이유도 없다. 특검제든 국정조사든 그런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다.


세 아들이 모든 의혹을 직접 소명하는 것이 최선


만일 그가 아들들의 결백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설령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현상황이다. 시간은 김대통령 편이 결코 아니다.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처, 단순 명료한 처방만이 남아 있다.


나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스스로 온 국민을 향해 의혹의 대상이 되어 있는 모든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소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위법 행위가 있었다면 그 모두를 당당하게 밝히고 법적 책임을 질 용의가 있음을 선언해야 한다.


만일 국민이 그 진지성을 진실로 납득한다면 ‘고백’의 드라마는 오히려 대통령 일가를 누적된 의혹과 정치적 위기로부터 단숨에 건져낼 수도 있다. 설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김대통령은 역사 앞에서는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임기 말이라고 모두 레임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레임 덕의 본질은 권위 상실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는 임기 마지막 날에도 힘을 지닌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에게 남은 임기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시간과 기회가 남아 있다. 문제는 도덕적 용기다. 그리고 용기에 바탕을 둔 결단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해악’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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