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 몰수’가 미덕이다
  • 김상익 편집위원 (kim@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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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텔레비전 영화를 보며 새삼스럽게 느낀 점이 있다. 프로그램에 ‘명화’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는 B급 영화만 줄창 틀어대는 것이 우리 방송국들의 못된 습관이지만, 별 2개를 주기 아까운 영화에도 한두 마디쯤은 그럴듯한 대사가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근육질 흑인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가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를 박멸한다는 그렇고 그런 영화였는데,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라는 대사가 썩 마음에 들었다. 독창적이고 심오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뻔한 계산속이 들여다보일 뿐이지만, 싸구려 영화답게 겉멋만 잔뜩 부린 상투성에서도 애써 미덕을 발견하자니 발견되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처럼 결코 별 2개 이상을 줄 수 없는 한국 정치에 대해서도 욕만 퍼붓지 말고 이쁜 구석을 찾아보자는 작정이 들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이 결과적으로 이 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몰역사적 긍정론, 노태우 정권의 무능이야말로 권위주의 해체에 큰 몫을 했다는 아이러니컬한 낙관론 같은 것. 대통령의 아들이 국정에 깊숙이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김영삼 정권의 금과옥조에 대한 감사함 따위.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현명하지 못하다”


이 대목에서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는 웨슬리 스나입스의 B급 대사가 다시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자의 뼈저린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아들과 측근을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자고 깨면 새로운 게이트가 우후죽순처럼 머리를 쑥쑥 내미는데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조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파탄지경을 자초했다. 오죽하면 아들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우스개가 나돌겠는가. 그러니 그가 5년 임기를 마치며 후임자에게 남기는 심화 학습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곰보를 보조개로 보는 일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 경선을 끝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노무현씨로 확정되고, 한나라당의 경우 후보 경선이 계속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회창씨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외에 한두 사람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대선 레이스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5월31일부터 한 달 동안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지만, 그 기간에 각 당 대통령 후보의 이름으로 지방자치제 선거가 치러진다.


앞으로 7개월 남짓, 머리 좋고 학벌 좋고 능력 있고 수완 있는 인재들이 대통령 후보 주변에 얼마나 많이 몰려들지 나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결국은 집권에 공을 세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갈릴 것이라는 점이다. 벌써부터 한 자리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은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이 두 가지 부류로 나뉘리라는 것쯤은 말하나 마나이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과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


오는 12월 대통령 당선자로 뽑히는 후보가 논공행상 문제로 머리가 좀 복잡해지리라는 것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때 이른 감이 있지만, 다음번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천박하고 거친 표현에 대한 양해와 함께 이제부터 ‘안면 몰수’를 해달라는 부탁이다.


따지고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실패는 상당 부분 안면을 몰수하지 않고 안면을 관리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했다. 야당 시절 아무리 고생을 같이 하고 신세를 졌더라도 그들이 한 자리를 부탁할 때 안면을 몰수했어야 했다. 믿고 기용했던 참모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독한 마음으로 얼굴을 바꾸었어야 했다. 아들들이 구설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정 잡배도 아닌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할 짓이 못된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업 자체가 보통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안면 몰수는 국민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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