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축구와 여체 이데올로기
  • 안병찬 (<시사저널>편집고문·경원대 신방과 교수) (abc@sisapress.com)
  • 승인 2002.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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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본능과 투쟁의 스포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열정과 절제된 폭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축구에 침투와 침략의 속성도 있다고 본다. 본래 축구는 세차게 날아오는 공을 소중한 머리통으로 박치기하고 선수끼리 맞부딪치며 몸싸움을 거는 우악스러운 운동이다.





운동 경기는 역사적으로 남성 지배 체제의 소산이다. 축구 역시 단련된 남성의 육체 위에 구축된 운동이다. 남자는 남성성(사내다움)을 다짐하기 위해 스포츠 경쟁에 참가한다. 축구는 남자 선수 22명과 남자 심판 3명이 경기장을 뛰는 운동이다. 그런 남자 축구가 미(美)와 기(技)를 운위하면서 폭발적인 흥행을 하게 된 것은 텔레비전의 지배 아래 들어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직업 축구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미와 기를 뽐내는 ‘예술 축구’(아트 사커)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많은 여성이 월드컵을 향해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보니 궁금증이 일어난다. 여성들이 일시에 월드컵에 몰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아는 여성 교수는 오프사이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경기 규칙과 상관없이 월드컵 경기에 몰입한다고 했다. 연예 스타에게 열광하는 ‘오빠 부대’처럼 꽃미남 축구 선수에게 열광하는 신세대의 출현도 목격한다. 여성 특유의 동반 심리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대생 7명이 진술한 ‘월드컵 소감’


나는 요즘 만나는 여성마다 월드컵 경기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중년 여성은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한국 선수가 출장하는 월드컵 경기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와, 골인” 하는 함성이 들려오면 얼른 채널을 돌려 한국 선수의 승리를 확인한다고 했다. 나는 여대생들에게도 월드컵에 관심을 두는 까닭을 진술하도록 주문했다. 이런 의견들이 나왔다.


여대생 1:축구 경기는 남자들의 잔치가 절대로 아니다. 작은 공 하나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여자도 그 세계의 구성원이다.
여대생 2:어떤 스포츠이건 여자 경기보다 남자 경기가 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보인다. 여자들도 남자 선수의 움직임 등을 보면서 참여 의식과 대리 만족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여대생 3:여성들은 나름의 입지를 지키며 여성적인 패션과 표현으로 응원에 동참하고 있다.


여대생 4: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개인 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대생 5:우리집에서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진다. 오빠와 아버지는 월드컵을 시청하고 나와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기 바쁘다. 나는 축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적고 흥미도 덜하다. 이는 개인적인 성향이라고 본다.
여대생 6:월드컵이 남성들을 위한 축제라는 생각은 남성들만 운동 경기를 좋아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비롯한 또 하나의 고정 관념이 아닌가 싶다.
여대생 7:선수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월드컵이 남자만의 축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의문이 있기는 하나 모두 함께 즐기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 7명의 진술문에는 월드컵을 대하는 여성들의 여러 가지 인식이 섞여 있다. 그런데 여성단체의 페미니스트 간부 한 사람은 월드컵 몰입을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구별하려는 접근법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스포츠의 성적 평등〉을 쓴 여성 학자 제인 잉글리시는 스포츠의 여체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강조한다.

‘스포츠의 핵심 요소는 속도·크기·힘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게 인식된 스포츠라면 여자는 열세일 수밖에 없다. 만일 여자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성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스포츠의 개념은 의심할 여지없이 생판 다르게 진화했을 것이다. 운동 경기는 유연성·균형·힘·기회 포착(타이밍)·아담한 신체가 판정 기준이 되어 텔레비전 화면을 점령했을 것이다.’


월드컵은 ‘선도 악대 효과’(밴드웨곤 효과)를 일으켜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 행렬을 뒤따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훗날에는 여성 선수가 체급으로 나눈 운동 경기에 참가하여 남성 선수와 더불어 미와 기를 겨룰 날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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