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드라마의 병리학
  • 고미숙 (문화 평론가) ()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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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개인적인 임상 사례부터. 대학 1학년 겨울에 시작하여 한 10년간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은 적이 있다. 환절기만 되면 눈물·콧물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병인데, 설상가상으로 당시는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절이어서, 결국은 1년 내내 병을 달고 다녀야 했다. 의사의 진단은 간단 명료했다. 현대 의학으로는 불치병이어서 항히스타민제를 먹어 증상을 완화시키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 이 약은 먹기만 하면 한없이 졸립고 나른해지는, 일종의 마취제다. 운좋게 한약으로 완치될 때까지 내 청춘은 비염, 아니 항히스타민제와 함께 보내야 했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나처럼(?) 대개 불치병을 앓는다. 물론 알레르기성 비염 같은 ‘스타일 구기는’ 병이 아니라, 환자가 되는 순간 더더욱 우아해지는 병을 앓는다. 백혈병(<유리 구두>), 뇌종양(<네 멋대로 해라>), 심장병(<인어 아가씨>) 등등. 흥미로운 것은 스토리와 장르에 관계없이 병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태도가 한결같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문득 의사에게서 선고(!)를 받는다. 그 순간 의사는 재판관 혹은 사제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환자건 의사건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인 채, 오직 약이나 수술 같은 첨단 기술에 의존하려 할 뿐.


이런 설정은 현대 의학의 병리학적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현대 의학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에 대해 무관심하게, 아니 무지하게 만든다. 병에 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겨져 있어서 환자는 그저 의사의 지시(사실은 명령!)에 따르는 것말고는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떤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면 의사의 ‘전지전능한’ 지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현대 의학은 기본적으로 ‘병인체론’에 기대고 있다. 병인체론은 병의 원인을 외부에서 침투한 병균에게서 찾는 것으로, 당연히 치료의 초점은 투약이나 수술을 통해 병든 세포를 절단하는 데 둔다. 육체와 정신, 질병과 건강의 이분법이 중첩되어 있는 셈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비염을 고칠 때에도 그 원인이나 내 신체적 특성, 생활 방식 등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병리학적 신앙에 심각한 균열을 느끼게 된 것은 <동의보감>을 통해서이다. 얼마 전 내가 몸 담고 있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중세 사상과 관련한 주요 텍스트를 읽어 가다 <동의보감>을 접하게 되었다. 지난해인가 드라마 <허준>이 인기 상종가를 칠 때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저 무덤덤하게 읽기 시작하다 마치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죽거나 나쁘거나’식 허무주의 벗어날 때


<동의보감>은 일단 사상사 텍스트로서도 문제작이었다. <황제내경>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의학 지식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교·불교·도교를 넘나드는 사상사적 모색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 프리즘을 통해 현대 병리학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동의보감>이 말하는 의학의 기본 테제는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건강이란 체질과 환경 및 인간 관계가 조화로운 리듬을 이룰 때 가능하다. 이 리듬이 깨어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병을 앓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병은 일종의 메시지인 셈이다. 삶의 리듬을 다시 회복하고 관계를 변화시키라는. 약이나 수술에 의존하는 것은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기 몸에 대한 조절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무지의 소치나 다름없다. 계보와 체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최근 주목되고 있는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가 펼쳐 보일 사상의학 역시 기본적으로는 <동의보감>의 테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새삼스레 복고주의를 주창할 의도는 없다. 다만 현대 의학을 맹신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병이 선고되고, 숙명적 체념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끌려가는 멜로 드라마의 병리학(죽거나 나쁘거나!), 이제 그 출구 없는 허무주의의 회로를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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