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만 앞세운 ‘맥없는 영웅’
  • 김봉석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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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라고 해서 꼭 걸작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거장의 필모그래피에는 걸작과 졸작이 나란히 등재되어 있고, 때로는 두어 편의 걸작만으로도 거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이머우는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고 <귀주 이야기>와 <인생> 등 걸작을 만든 감독이다. 하지만 신작 <영웅>은 겉만 번지르르한 실패작이다. 량차오웨이와 장만위, 리롄제와 장쯔이라는 중화권 최고 스타들을 모아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의 군대를 부활시킨 엄청난 물량 공세로 만들어진 <영웅>은 맥락과 상관없이 멋진 액션 장면 몇 개만 겨우 건질 수 있는 영화다.





<영웅>의 무대는 진시황이 아직 영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해 가던 시기다. 수많은 나라를 힘으로 굴복시킨 영정에게는 끊임없이 자객들이 습격한다. 어느 날 무명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영정이 가장 두려워하던 자객인 파검과 비설을 죽였다고 말한다. 무명은 시기와 질투심을 이용하여 연인인 파검과 비설을 갈라놓고 죽였다고 했다. 그러자 영정은 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파검과 비설은 한낱 질투심 때문에 자멸할 사람들이 아니라며, 아마도 당신(무명)은 나를 죽이러 온 자객이고, 파검과 비설은 대의를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했을 것이라고.


어긋난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부족해


<영웅>은 무명과 영정의 대화를 따라 장면이 펼쳐진다. 무명이 상황을 설명하면 그대로 장면이 펼쳐지고, 다시 영정이 뒤집어서 설명하면 그렇게 상황이 바뀌어 버린다.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형식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로사와는 다양한 사람의 진술을 통해 현실의 가려진 이면을 드러내고,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영웅>에는 그런 진지한 물음이나 어긋난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없다.


<영웅>의 색채 감각은 여전히 뛰어나다. 파검과 비설의 옷은 무명이 말할 때와 영정이 말할 때 색깔이 바뀐다. 그들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숲에서 싸울 때에도 나무와 나뭇잎의 색깔이 자유자재로 바뀐다. 하지만 <붉은 수수밭>에서 보여준, 강렬한 색채가 인도하는 황홀경은 없다. <영웅>의 색깔은 단순히 상황과 감정의 전형적인 설명밖에 하지 못한다.


<영웅>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와호장룡>이 떠오른다. 북미에서만 1억 달러 흥행을 기록한 <와호장룡>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무협 영화 붐을 일으켰다. 가장 중국적인 무협 영화가 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장이머우는 ‘남방적인 <와호장룡>과는 다른 북방적인 무협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붉은 수수밭> 등 초기작들이 보여준 강렬한 색채를 다시 사용한 것말고는 새로운 것이 없다. <영웅>은 <와호장룡>처럼 사막 풍경이 나오고, 나무 위에서 싸움을 벌이고, 주인공은 쓸쓸하게 죽어간다. <영웅>은 <와호장룡>에 열광했던 서양 관객들을 현혹하겠다는 목적 의식이 너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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