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은 어디에…
  • 진중권(문화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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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법 사수가 기독교인이 내걸 수 있는 구호인가? 그리스도가 반인권의 화신이란 말인가? 사회는 바뀌고 있다. 정치는 민주화하고, 경제는 투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는 자정 시스템이 결여되어 있다.”
 
기독교 보수 교단이 추락했다. 목사는 우파 선동가가 되고, 교회는 우익 동원 조직이 되고, 신도들은 할렐루야 반공주의 성가대로 전락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던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건만, 그를 따른다는 자들이 내지르는 목소리는 온통 증오와 저주의 말로 가득 차 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듬성듬성 다니던 교회, 확 끊어버리고 싶다.

기독교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때 기독교는 이 땅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했다. 구한말에는 신분 철폐의 해방을 체험하는 공간이었고, 식민지 시대에는 교육 의료 등 이 땅에 근대적인 문화를 도입하는 창구였고, 군부 독재 시대에는 인권과 민주화 운동으로 권력의 폭압으로부터 시민들을 지켜주는 신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때만 해도 기독교는 사회보다 늘 한 발짝 앞서갔고, 그 때문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예수보다는 세상을 닮아갔다. 목사는 사업주가 되고, 신도는 고객이 되고, 목회는 기업 활동이 되고, 교회는 상속이 가능한 사유 재산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은 곧 전도의 기적이었다. 어느 목사는 공공연하게 말한다. “성장을 안 하면 교회는 망한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기업이 실존하는 방식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는 이들을 채찍으로 다스렸지만, 오늘날 시장 원리가 교회만큼 철저하게 관철된 곳이 또 있을까?

닫힌 교회로 스며드는 열린 사회의 영향력

사회는 바뀌고 있다. 정치는 민주화하고, 경제는 투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보수 정치·재벌 경제와 함께 성장해 온 교회에는 자정 시스템이 결여되어 있다. 목사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다. 어차피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목사가 곧 신이 되지 않겠는가? 이 신적 권위 앞에서 ‘비판’이란 애초에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교회도 어차피 인간의 모임, 비판이 없는 곳은 썩을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교회가 구현한 정신성이 외려 사회의 일반적 발전에 처져 버린 것이다.

왜 대형 교회들이 들고일어났을까?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들이 말하듯이 다 망해가는 휴전선 너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휴전선 아래에서 급속히 변해가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두려움, 즉 닫힌 교회로 스며드는 열린 사회의 점증하는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회의 세습은 비난받고, 사학은 비판받고, 채플에는 제동이 걸리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한계에 달했고, 교세는 줄어드는 상황이다. 이제는 외려 사회가 맛이 간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보안법 사수가 기독교인이 내걸 수 있는 구호인가? 그리스도가 반인권의 화신이란 말인가? 세상도 화해를 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사랑이 제일이라는 종교에서 기껏 증오로 가득 찬 반북 구호나 외치고 있다. 기독교가 아니라 실향민교다. 도대체 어느 나라 기독교인들이 남의 나라 국기를 들고 기도회를 하는가? 교회는 목사가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는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집을 고작 우익 동원 조직으로 바꿔놓고도 심판이 두렵지 않다면, 아마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지 않고 있을 게다.

게다가 부시를 찬양하는 것은 또 뭔가? 이라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 안 보이는가? 심지어 이라크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도의 성전으로 축하하는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하긴, 예수를 죽인 유태인들을 학살한 나치 친위대의 3분의 2가 보수적인 기독교도들 아니었던가. 수천, 수만 개의 억울한 무덤이 널린 삭막한 사막 위의 허공에 징그럽게 드리운 저 시커먼 미소는 누구의 것일까? 그리스도의 것인가? 아니면 적 그리스도 사탄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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