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솔숲 순례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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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애국가 가사 ‘남산 위에 저 소나무’나 ‘낙락장송’ 같은 관용어에서 보듯 우리에게 소나무는 민족 고유의 심성과 가치관이 투영된 일종의 관념이자 형이상학이다. 생명과 장생, 탈속과 풍류, 지조와 절개 등 소나무로 상징되는 의미의 자장은 크고 넓다. 그래서 소나무는 뭇 나무 가운데 한 나무가 아니라, 작가 김동리가 <송찬(松讚)>이라는 글에서 잘 표현한 대로 백목지장(百木之長)이요, 만수지왕(萬樹之王)이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 산림의 60% 이상을 차지하던 솔숲이 지금은 겨우 25%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같은 추세대로라면, 소나무가 앞으로 50년 뒤에는 남한에서, 그리고 100년 뒤에는 한반도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마음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늘 함께 해왔던 소나무가 이제 특별한 보살핌이 없이는 조만간 보호수로서나 연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전영우 교수(국민대·산림자원학)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현암사 펴냄)는 ‘소나무가 사라진다’는 문제 의식 아래 씌어진 소나무숲 현장 보고서로서, 저자가 지난 3년 동안 직접 답사한 전국의 유명 소나무숲 29곳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와 관련된 역사·문화·생태·환경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 저자는 특히 소나무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보다는 ‘문화의 창’으로 소나무를 들여다보는 데 주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소나무 인문학’에 눈뜨도록 만들어준다.

예컨대, 전라북도 부안의 솔숲을 말하면서 조선의 바다를 누비던 거북선과 전함의 조선재(造船材)로서 소나무가 얼마나 요긴하게 쓰였는가를 밝히고, 충청남도 태안 안면도 솔숲을 이야기하면서는 궁궐 축조를 위한 금송(禁松) 정책과 소나무가 국용재(國用材)로 조달된 과정 등을 언급한다. 경상남도 통영 인정사 솔숲에서는 조선시대의 산림 감시 신분증이었던 금송패 이야기를 들려준다.

‘송계’짜서 소나무 보호


경기도 광주의 솔숲에서는 백자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숯이나 재가 남지 않고 충분한 열량을 낼 수 있어 최상의 백자를 굽는 땔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백자의 밀접한 관계는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에 대한 기록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분원시장절수처란 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관요(분원)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광주군 6개 면의 소나무숲을 다른 관청에서는 전혀 벨 수 없게끔 절수처로 지정해 도자기 가마용 땔감으로만 사용하게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절수처는 10년에 한 번꼴로 옮기도록 해 광주 솔숲은 임업 선진국인 독일보다 앞서 보속원칙(산림에서 해마다 균등하게, 그리고 지속 가능하게 나무를 벨 수 있도록 하는 경영 원칙)을 실험한 현장이기도 했다.

전라남도 보성의 이리 솔숲은 기록으로만 남아 전하는 ‘송계(松契)’가 현존하는 곳이다. 즉, 마을 사람들이 ‘송계산’을 지정하고 규정을 정해 노동력과 기금을 갹출하고, 그 규약에 따라 산림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솔숲과 그 부산물을 이용하도록 계를 짜서 운용한 덕에 보성 이리 솔숲이 지금까지 대물림되며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땅 천평을 거느려 세금까지 내는 경상북도 예천 석송령 소나무, 소금가마 땔감으로 쓰였던 충청남도 태안 마금리 솔숲, 막걸리 마시는 충청남도 홍성의 당산 소나무 등 이 땅의 소나무에 얽힌 갖가지 흥미로운 사연들이 실려 있다. 소나무 인문학뿐 아니라 인공 조림의 문제점, 소나무 혈통 보존, 솔숲 방치 현장 등 ‘소나무 생태학’에 관한 정보 또한 상세하게 담겨 있다.

저자가 발로 뛰며 찍은 소나무 사진들이 눈맛을 시원하게 하고, 저자의 답사길에 동행했던 이호신 화백의 그림도 볼 만하다. 인파로 온산이 뒤덮인 단풍놀이보다는 이 책을 길라잡이 삼아 솔숲 순례에 나서는 것도 썩 괜찮은 가을 여행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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