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신의 원형을 밝히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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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 지음 <사무라이>
 
사무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미야모토 무사시다. 맞수를 찾아 일본 전역을 방랑한 고독한 검객의 이미지는 ‘폼 나는’ 사무라이의 전형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는 사카모토 료마도 메이지유신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혁명적 풍운아의 이미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역시 폼 나는 사무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춘향전>에 비견될 만한 일본의 국민적 고전 <주신쿠라(忠臣藏)>를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복수를 감행한 다음 전원 할복 자살한 47인의 사무라이가 일본인들에게는 폼 나겠지만, 우리 정서로는 참 별종들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작품 곳곳에 출몰하는 참혹한 ‘피범벅 죽음’은 사무라이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충의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니토베 이나조의 <사무라이>(양경미·권만규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는 사무라이에 대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선입견을 상당 부분 교정해 준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게 한다. 일본 화폐에 초상화가 실렸을 만큼 저명한 ‘근대의 교양인’이었던 저자가 1899년 서양인을 위해 영어로 쓴 이 책은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독자들을 ‘일본적인 것’의 연원으로 안내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무라이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고유의 정신이다. 과거의 일본은 사무라이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적인 일본, 혹은 도덕적인 일본은 직·간접으로 무사도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무라이가 탄생하고 성장한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무사도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움과 힘을 간직한 채 일본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같은 ‘선언’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충(忠) 의(義) 용(勇) 인(仁) 예(禮) 견인(堅忍) 명예 같은 사무라이의 덕목들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그 구체적 사례들을 들려준다. 예컨대, 용기를 말하는 부분을 보면, 사무라이의 용기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듯 무지막지하게 저돌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사도에 깃든 ‘죽음의 미학’ 분석

용기란 ‘곤경이 닥쳐도 허둥대지 않고 여유를 잃지 않는 도량이 큰 마음’으로서, 죽음과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라이는 자객의 창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도 단가(短歌)를 지어 주고받는다. 창을 찌른 자객이 ‘시간이 되었으니 생명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앞구절을 읊자, 사무라이는 ‘평소에 육신은 없는 것이라 여겼네’라는 대구로 응수하는 식이다.

명예에 대한 집착, 곧 불명예에 대한 굴욕감은 저자도 인정하듯 과도한 측면이 있었다. 한 평민이 사무라이의 등에 벼룩이 붙어 있다고 알려준 일만으로 칼에 찔려 죽었을 정도다. 벼룩은 짐승에게나 붙어 사는 벌레이므로 ‘높으신 사무라이와 짐승을 동일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라는 기괴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안전판은 마련되어 있다. 명예의 규범이 병적 과잉으로 빠지는 것을 제어하기 위해 인내와 관용이 사무라이의 또 다른 덕목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괴하기로 치면 아마도 할복이 으뜸일 텐데, 저자는 할복이 전혀 불합리하지 않단다. 사무라이에게 할복은 단순히 목숨을 끊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잡고 수치심을 벗는 ‘법률과 예법 상의 제도’였으며, 하필 배를 가르는 것은 그곳에 ‘영혼과 신념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 신념’ 때문이다. <주신쿠라>의 사무라이들이 집단 할복하면서도 발작과 착란, 흥분의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지난 100여년 동안 외국인이 일본인과 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교과서 역할을 한 이 책은 그러나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사무라이의 실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는 데다가, 그 생각 속에 일본 우익의 정신적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기 때문이다.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일본인이라도 표피를 벗겨보면 거기에 사무라이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저자의 말은, 과거에 진행되었고 지금 부활하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가를 가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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