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사마 신드롬과 아줌마의 힘
  • 이명호(가톨릭대 강의전임 교수·<여성과 사회> 편집 ()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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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년 여성들이 배용준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여성을 배려할 줄 아는 신사다움이다. ‘배려하는 위치’에서 ‘배려받는 위치’로 옮겨가고 싶어하는 욕망이 일본에서 충족되지 못할 때 그녀들은 국가의 경계를
 
일본 열도를 휩쓸고 있다는 욘사마 열풍이 나와 같은 평균적인 한국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감정은 다소 어벙벙한 즐거움일 것이다. 중국과 동남아에 한국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도 비슷한 느낌을 갖기는 했다. 오랫동안 문화 수입국이던 우리가 드디어 문화 수출국이 되었다는 자부심 한켠으로, 우리 문화의 무엇이 그들을 매료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 땅에 불고 있다는 한류 열풍은 동남아의 경우와는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아시아 최대 문화 강국이자 우리가 ‘왜색’을 걱정하며 문화적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나라가 아니던가. 바로 그 일본에 한국 바람이 불다니!

하지만 일본발 한류의 핵심에 ‘일본 아줌마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경멸적 시선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10대 소녀도 아닌 40~50대 중년 여성들이 타국의 ‘꽃미남’에 빠져 <겨울연가>를 몇 번씩 보고도 모자라 촬영지 한국을 방문하러 몰려가는 모습은 일본 남자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배용준이 지난 달 일본을 방문했을 때 ‘욘사마를 보게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외치는 일본 여성들의 행동은 그들에게는 정신 나간 여자들의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바타리언’(아줌마와 외계인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배용준 팬들을 폄하한다. ‘에도 시대 일본을 찾은 조선통신사 4백~5백 명보다 욘사마 한 사람의 역할이 더 크다’며 욘사마 신드롬의 의미를 한껏 치켜세울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이다.

일본 남자들의 반응 속에,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의 남성에게 자국 여자들을 빼앗겼다는 심리적 박탈감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양 남자라면 모를까, 그들에게 조센진은 경쟁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한국 남자에게 자기 아내들이 미친 듯 빠져들다니. 일본 남성들의 자존심에 생긴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남자들의 시선 역시 마냥 곱지만은 않다. 일본 여자들을 매료할 만큼 한국 남자의 우수성을 과시했다는 그릇된 자부심 뒤에는, 남자 연예인을 따라 다니는 여자들 일반에 대한 경멸감이 자리 잡고 있다. 잘생긴 스타 오빠를 찾아 괴성을 질러대는 10대 소녀들의 광기가 중년 아줌마들에게 전염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10대 오빠부대를 비하하여 부르던 ‘빠순이’라는 호칭이 일본 아줌마들에게 옮겨간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배용준은 레드퍼드 능가하는 고전적 신사”

하지만 욘사마에 대한 이 ‘외계인 아줌마들’의 열정에는 한·일 양국 남성들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 반란의 욕구가 잠재해 있다. 그녀들의 열광 뒤에는 꽃미남에 대한 중년 여성의 호사 취미나 권태에 빠진 가정 주부의 일탈적 광기로 치부될 수 없는 요소가 들어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50대인 한 일본 여성은 “욘사마는 일본의 대중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미소년 류가 모방할 수 없는 고전적인 신사이다. 배용준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은 로버트 레드퍼드지만, 그는 한물 갔다”라고 말한다. 일본 중년 여성들이 배용준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여성을 배려할 줄 아는 신사다움이다. 그녀들은 여성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할 줄 아는 남성상에 대한 갈증을 욘사마를 통해 풀고 있다.

이제 그녀들은 ‘배려하는 위치’에서 ‘배려받는 위치’로 옮겨가고 싶어한다. 이 ‘자기에 대한 배려’가 가부장적인 일본 사회에서 충족되지 못할 때 그녀들은 국경을 넘는다. 이제 그녀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자신들의 욕구를 대변할 대중적 아이콘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녀들의 욕망이 동아시아의 문화 지형을 바꾸고 있다. 아줌마들은 역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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