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늘, 여기’를 떠나려 하나
  • 허문영(영화 평론가) ()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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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공간에는 시간이 지워져 있다.시간은 세트라는 가상의 공간에만 존재한다. 펜션, 휴양지의 전망, 유럽식 거리의 이미지들에서 끌어온 인공 무대가 ‘오늘, 여기’를 대체한다.”
 
연말의 2004 연예가 결산 프로그램을 별 생각 없이 보다가 몇몇 드라마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러브스토리 인 하바드> <파리의 연인>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의 인기작이었던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해외가 무대라는 점이다. 동남아 휴양지가 무대였던 <황태자의 첫사랑>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이국 취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문화권에나 이국 취향은 있어왔고, 그것이 어떤 시점에 대대적으로 유행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제목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직업상 늘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국 영화의 어떤 경향과 이 제목들이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이 한국 대중 문화 전반의 경향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경향은 공간 재현에 관련된 유형이다.

최근의 한국 영화는 필사적으로 ‘오늘, 여기’를 떠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 욕망은 대개 세 가지 출구를 찾는다. 하나는 ‘어제, 여기’라는 출구다(<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다른 하나는 ‘어제, 거기’라는 출구다(<바람의 파이터> <역도산>). 마지막은 가장 많은 사례를 거느린 ‘오늘, 유사 여기’라는 출구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다. ‘오늘, 여기’를 떠나려는 경향을 소재 다양화라고 쉽게 말해버릴 수 없는 이유도 이 세 번째 때문이다.

예컨대, <귀신이 산다> <분신사바> <장화, 홍련>의 무대는 한적한 교외 주택 혹은 건물이다. <올드 보이> <얼굴 없는 미녀>의 공간은 호화 빌딩의 상층이다. 모두 지역성이 드러나지 않는 추상화한 공간이다. 그 공간은 다르게 관찰된 여기가 아니라 다르게 조작된 여기이며 일종의 가상 공간이다. 그리고 대개 세트다. 펜션, 펜트하우스, 휴양지의 전망, 유럽식 거리의 이미지들에서 끌어온 인공 무대가 ‘오늘, 여기’를 대체한 새로운 공간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전작이 서울의 거리를 중요 무대로 삼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변화는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풀하우스>의 주무대는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창이 마련된 화려한 2층 건물이다. 예쁘고 발랄한 남녀 주인공들이 이곳에서 귀여운 사랑 게임을 벌인다. 이상한 것은, 드라마 안에서 이 공간이 서울 근교로 상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 무대는 섬이며, 그 주택은 세트다. 연출자인 표민수 PD가 <거짓말> <푸른 안개> 같은, 도시인의 우울한 사랑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변화도 놀랍다.

‘웰빙’과 ‘웰 메이드’의 욕망이 만났다?

재현되는 공간 이미지들이 이렇게 변화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할 수 있다. ‘오늘, 여기’가 추레하기 때문이다. 예쁜, 혹은 강한 비주얼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식하는 정도로는 불충분하며 아예 별도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니면, 앞서 말한 드라마들처럼 비주얼이 근사한 외국으로 가야 한다. 요컨대 창작가의 ‘웰 메이드’를 향한 의지가 ‘웰빙’의 대중적 욕망과 조우해 서양 이미지의 ‘근교 판타지’와 세트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견으로는, 한국의 공간이 지닌 가장 큰 난점은 추레함보다 그것의 비역사성이다. 한국의 공간에는 시간이 지워져 있다. 시간은 생활 세계와 분리된 고궁과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다. 대도시에 살면서 최신식 고층 건물을 제외하고 우리가 지나치는 담벼락과 골목과 집이 50년 뒤에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네 담벼락에 난 30년 전 낙서 자국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하류 인생>이나 <효자동 이발사>처럼 20년, 30년 전 과거를 다루는 작품들조차 세트 밖에서는 사실적인 묘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거리는 정착지가 아니라 임시 거주지처럼 보인다. ‘오늘, 여기’를 떠나려는 창작가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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