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해일’은 끝나지 않았다
  • 전상일 (환경보건학 박사, www.eandh.org) ()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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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수해 지역, 전염병·이질 ‘비상’…자살률도 크게 늘 듯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동남·서남 아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l(tsunami)로 인한 사망자 수가 12월30일 현재 10만명에 육박한다.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이지만, 그 피해는 재해가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특히 대규모 수해를 동반한 경우에는 장티푸스·콜레라· 렙토스피라병·A형 간염 같은 수인성 질병과, 말라리아· 뎅기열· 황열병과 같은 곤충 매개성 질병이 발생할 위험이 높다. 해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말라리아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 쓰나미의 공격은 말라리아 발생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수인성 질병을 퍼뜨리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오염된 식수이다. 수해가 발생한 지역에서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면 위장병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어린이와 노약자, 위장병을 앓던 사람들은 더 위험하다.

미국 환경부(EPA)는 2001년 미시시피 강을 범람시키며 미국 중서부를 강타했던 홍수가 지나간 뒤, 이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구토·복통·설사 따위 질병 발생률을 조사했다. 분석 결과 다른 시기에 비해 홍수 기간에 이러한 증세가 나타난 비율이 29% 높았고, 이질 발생률도 23% 높았다. 하지만 홍수 발생 기간에 지하수가 아닌 수돗물을 먹은 사람들은 위장병 발생률이 증가하지 않았다. 비위생적인 물을 마신 것이 위장병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오염된 물을 직접 마시지 않고 단순히 접촉하는 경우에도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상처 감염, 피부염, 결막염, 귀·코·목구멍 감염이 그 예이다.

수해를 입더라도 후속 조처를 신속히 한다면 질병이 전파될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수인성 질병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염소(chlorine) 소독이다. 염소라는 화학 물질은 수인성 질병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병원체를 죽이는 효과가 있다. 오염된 물을 다루는 사람들은 A형 간염에 대한 예방 접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수해는 장기적으로 곤충 매개성 질환을 일으키는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해로 인해 해충의 서식지가 넓어지고, 개체 수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질병이 말라리아이다. 곳곳에 고여 있는 물은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에게 알을 낳는 장소로 활용된다. 1991년 코스타리카 지역에서 지진에 이어 일어난 홍수와, 2004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홍수가 발생한 뒤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다.

수인성 질병과 달리 곤충 매개성 질병은 수해가 발생한 뒤 곧바로 유행하지 않으므로, 이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 실내외를 소독하고, 해충의 서식지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 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병원으로 옮겨 질병 확산을 막아야 한다.
일반적인 우려와 달리, 자연 재해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은 질병 전파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병원체는 시신에서 오랫동안 살아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DS를 유발하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는 시신에서 최대 6일까지 생존할 수 있다.

지역 주민과 달리 시신을 다루는 사람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시신을 다루는 과정에서 결핵, 혈액을 매개로 전파되는 B형 및 C형 간염 바이러스와 HIV에 감염될 수 있으며, 설사병· 살모넬라증·장티푸스·콜레라 등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 재해, 성생활에도 큰 변화 일으켜

또한, 시신으로부터 대변이 배출되는 경우가 흔한데, 시신과의 직접적인 접촉이나 의복, 운반 차량 등으로부터 대변 성분이 구강을 통해 체내로 침입하면 각종 소화기계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시신으로 인한 질병 전파의 위험은 매우 낮으므로, 시신을 곧바로 매장하거나 화장할 필요는 없다. 시신을 매장할 경우에는 식수원으로부터 최소 30m 이상 떨어진 곳에 묻어야 한다.

자연 재해는 그 피해로부터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해도 입힌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적 손상과 가족의 사망, 그리고 그 이후에 겪은 사회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재해를 겪은 사람에게 우울증 발생률과 자살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이같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타이완의 국립 양명대학 연구진은 1999년 타이완에서 지진이 발생한 뒤 2~15개월 동안 자신이 직접 상해 및 재산 피해를 보았거나, 가족이 사망한 이재민 30여만명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자살률은 지진 피해와 무관한 사람들보다 46% 높았다.

자연 재해는 인간의 성생활 행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고 나서 생명의 고귀함을 새삼 깨닫고 성행위 빈도를 늘리거나, 반대로 성적 욕구가 사라져 성행위를 아예 하지 않는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성 호르몬의 변화가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번 동남·서남 아시아 지진 해일 피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동안 현대인들은 자연을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놀이 대상쯤으로 인식해 왔다. 현대인들은 산속 깊숙이 혹은 바닷가 가까이에 집단적으로 거주지를 형성하며 살고 있는데, 이는 자연 재해가 발생할 경우 인명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요인이다. 인간이 화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미국 국방부의 특별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미래에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경제적 발전이나 과학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기상 이변에 따른 자연 재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 골자였다. 앞으로 국가 안보도 자연 재해에 대한 대응 능력의 개념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지구상에서 자연 재해로부터 안전한 나라는 없다. 자연 재해에 대한 예측 능력을 높이고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사전에 구축해야 한다. 지금 몰디브는 지진 해일로 국가가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자연 재해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는 잃더라도 외양간마저 잃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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