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뭉실해진 ‘엽기 판타지’
  • 김봉석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5.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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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무조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린 생각’이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원작자인 레모니 스니켓의 발상이 그렇다. 귀여운 요정이 나오고, 약간 고생을 겪지만 결국 사랑과 행복을 되찾는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북미에서만 8백만부가 팔린 ‘레모니 스니켓’ 시리즈는 화재로 부모를 잃은 보들레어 삼남매와 유산을 빼앗으려는 올라프 백작의 대결을 따라가는, 고난의 기록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레모니 스니켓은 자기가 직접 취재했으며, 몇몇 사건은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당연히 허구이지만, 레모니 스니켓의 신랄하면서도 감각적인 대화체는 독자와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야기에 끼어들고 미리 결말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 파격이 더 즐겁다. 기존 동화와 다르지만, 이 엽기적인 동화는 충분히 맛볼 만한 가치가 있다.

브래드 실버링 감독은 열한 편이 나와 있는 원작 중에서, 앞의 세 편을 모아 한 편의 영화로 각색했다. 보들레어 삼남매가 올라프 백작에게 맡겨지는 <눈동자의 집>, 파충류 학자인 몽티 삼촌과 만나는 <파충류의 방>, 사고로 남편을 잃고 온갖 공포증에 시달리는 조세핀 숙모의 벼랑 끝 집에서 벌어지는 <눈물샘 호수의 비밀>이 한 영화 안에서 빠르게 펼쳐진다.

짐캐리 연기 너무 뛰어나서 탈?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모두 세트에서 촬영된 <레모니 스니켓>은 볼거리가 충분하다. 발명광인 바이올렛, 독서광인 클라우스, 모든 것을 물어뜯는 서니. 이 삼남매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장면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미래에 벌어질 모험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충분히 암시한다. 삼남매의 유별난 특징은 위험에 처하는 순간마다 위력을 발휘하며 살아난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하면서도 섬세하게 전개되는 <레모니 스니켓>은 블록버스터 판타지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영상은 멋지고, 이야기는 흥미롭고, 관객은 상상의 세계에 푹 빠져든다.

하지만 올라프 백작인 짐 케리는 어떨까? 연극배우 출신이며, 매번 변장을 하고 삼남매의 뒤를 쫓아가는 올라프 백작 역에 짐 케리 이상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짐 케리의 연기는 여전히 뛰어나고,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시선을 빼앗는다.

짐 케리의 매력이 <레모니 스니켓>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상당 부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짐 케리가 출연함으로써 <레모니 스니켓>의 고유한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짐 케리의 연기로 <레모니 스니켓>을 이끌어가는 것은 너무 수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레모니 스니켓>의 원작은 냉소적이고, 풍자적이고, 어둡다. 그리고 재기로 가득하다. 쉴새 없이 끼어드는 작가이자 화자 레모니 스니켓의 노골적인 간섭이나 어른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 등이 희석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브래드 실버링의 전작이 <캐스퍼> <시티 오브 엔젤> <문라이트 마일>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장기는 따스한 판타지다. 대중적인 블록버스터로 만들기 위해 더 일반적인 판타지로 다듬었지만 <레모니 스니켓>의 본질은 냉소적인 동화다. 브래드 실버링보다는 팀 버튼의 날카로운 스타일이 더욱 필요했던 영화였던 것이다. <레모니 스니켓>은 보기도 즐겁고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보고 나면 한 켠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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