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개흥정’ 전모를 밝혀라
  • 유승삼 (언론인·KAIST 교수) ()
  • 승인 2005.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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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우리 겨레는 또 한번 굴욕을 당할 형편이다. 남은 관련 문서라도 조속히 공개해 한·일 협정의 굴욕적인 흥정 내막을 속속들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일본에도 반성할 기회를 주고, 북한의 협상력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쿠데타 집단의 라디오 성명이 온 국민의 새벽잠을 앗아갔다. 학생들의 흥건한 피를 제물로 바치며 처음으로 맛보게 된 민주주의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 걸음마를 지켜보아 오던 세계 각국이 이 쿠데타를 비난했다.

그러나 오직 한 나라의 집권 세력만은 기뻐했다. 바로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 집권 세력의 지도자이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한·일 수교 협상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한국엔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모든 것은 박정희 등 소수 지도자의 마음대로 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정희를 만족시키기만 하면 국회도 없고 해서 장애가 없다.” 또 다른 정계 지도자인 고노 이치로도 “한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어, 매우 절박하게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유리한 흥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라며 적극적인 협상을 독려했다고 한다.

돈과 맞바꾼 민족의 자존심

아니나 다를까, 1952년부터 시작해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며 지루하게 줄다리기를 해온 한·일 수교 협상은 박정희 군사 정권 아래서 타결되었다. 경제 사정이 5·16 이후에만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실은 5·16 전이 더 어려웠다. 그래도 한국은 경제적 실리뿐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유혹을 물리치며 버텨 오던 터였다.

청구권에 관한 협정의 정식 이름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꽤나 긴 제목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저 달랑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라는 내용과 그 지불 방법 및 지불 기간이 전부이다. 그러면서 ‘두 나라 및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라고 못박고 있다. 한·일 협정을 ‘모개흥정’이라고 부르는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모개흥정은 그 뿐만이 아니다. ‘한·일 기본 조약’에서는 역사 해석까지도 적당히 흥정해 버렸다.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이른바 한·일 합병이 무효인가 아닌가에 관해 두 나라는 ‘이미 무효’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절충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한 해석을 서로 국내적으로 알아서 처리하자고 제안했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즉 한국 정부는 이를 1905년과 1910년 당시부터 원천적 무효를 뜻하는 것이라고 국민에게 설명하고, 일본 정부는 그들 국민에게 ‘이미 무효’는 1945년 8월15일부터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좋다는 제안이었다. 일제 36년이 합법적임을 한국이 인정했다는 해석까지 나올 수 있는 이 중대한 문제를 돈에 급급해 적당히 처리한 뒤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일 협정이 체결된 1965년은 공교롭게도 을사조약 이후 60년 만에 맞는 을사년이어서 비판자들은 당시 이 한·일협정을 ‘제2의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불렀는데, 조약이나 협정의 내용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굴욕적인 협상 결과는 북·일 수교 교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은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한국과의 균형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어디까지나 ‘경제 협력’이지 ‘배상’을 할 생각이 없다. 일본은 대북 수교 협상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도 한국과 해결한 방식을 모델로 하겠다는 전략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있다.

북한만이라도 민족적 자존심을 갖춘 협상 결과를 얻어 그것이 부실하고 부도덕한 한·일 조약과 협정을 보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지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극히 작아 보인다. 2002년 9월에 있은 김정일·고이즈미의 평양 북·일 공동선언에서 그런 조짐이 이미 나타났다. 선언에는 수교 후 일본이 ‘경제 협력’을 제공한다고 했지 ‘배상’이나 ‘청구권’과 같은 말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 겨레는 또 한번 굴욕을 당할 형편이다. 남은 관련 문서라도 조속히 공개해 한·일 협정의 모개흥정 전모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본에도 새롭게 반성할 기회를 줄 것이며, 북한의 협상력을 높여 주어 우리가 북한에게 짐지운 것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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