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은 행동주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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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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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바닷길’ 뗏목 타고 항해중인 윤명철씨
탐험가 윤명철씨(49)를 만나자 먼바다에서 묻혀온 듯한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만난 곳이 인천 해양경비정 부두여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바람 쐰 생선처럼 바짝 말라 있었고, 소금기가 반짝였다. 항해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깎지 않았다는 수염이 제법 자라 날카로운 얼굴 선을 가려주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대화 도중 수시로 휴대전화가 울려댔는데 통화가 끝날 때마다 그가 ‘정확히’ 화제로 복귀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라고 묻는 법이 없었다. 탐험가에게는 떠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돌아오는 능력일 터이다. 그래서 그의 ‘회귀 능력’은 일종의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두에는 그가 타고 온 뗏목이 매여 있었다. ‘장보고호’다. 지름이 20cm쯤 되는 거대한 대나무 56개를 두 겹으로 엮어 만들었다. 길이는 12.5m. 뒤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긴 사다리꼴이다. 갑판 위에는 돛이 앞뒤로 2개 세워졌고, 대여섯 명이 누울 만한 원두막 모양 선실이 있었다. 뗏목 무게는 4백50kg. 평균 2노트(시속 3.7km)로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이 뗏목을 타고 탐험하는 중이다. 3월24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저우산(舟山) 군도에서 출발해 산둥(山東) 반도 스다오(石島)와 인천, 완도를 거쳐 일본 규슈의 하카다 항까지 이어지는 총 2천7백km 바닷길을 뗏목으로 건너는 것이 목표다. 탐험대원 5명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

그의 탐험은 학술 연구의 일부다. 그는 삼국시대 한·중·일의 해양 교류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이며,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전임연구위원과 해양문화연구소 소장도 맡고 있다. 이번 탐사도 장보고 시대의 바닷길을 복원해 보고자 하는 그의 오랜 학술적 목표에 따라 기획된 것이다.

“고대 해양사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장보고가 어떤 루트를 항해했고, ‘장보고의 나라’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바닷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던 ‘장보고의 나라’는 그가 죽은 뒤 잊혔다. 한민족은 그 뒤 좁은 한반도 안에서만 아둥바둥 살아왔다. 그래서 당시의 물길을 찾는 탐험은 ‘민족의 과거를 복원하는 일일 뿐더러, 21세기 해양 발전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가 뗏목 탐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가장 원시적인 항해 수단을 사용해야 자연적으로 개척되었던 항로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후배나 학생 들이 붙여준 별명이 ‘인디애나 존스’. 그는 자신의 탐험을 ‘행동주의 역사학’이라고 불렀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 오히려 육지의 들길이나 산길보다 바닷길이 더 복잡하고 여행하기도 힘들다”라고 그는 말했다. 지름길이 있다고 해도, 육지처럼 그 길이 늘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혹은 햇살 내리쬐는 아침과 노을 지는 어스름의 바닷길이 다르다고 그는 말했다. 심지어는 보름달이 뜰 때와 샛별이 짝지어 나타나는 그믐 때의 물길도 다르다. 과학적 지식으로만 습득했던 이런 상식을 그는 이번 탐사에서 절실하게 되새겼다.

저우산 군도에서부터 산둥 반도까지 예인선에 매달려 이동한 뒤, 3월26일 산둥 반도 앞바다에서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한 직후였다. 한반도까지 직선으로 2백50여km. 바람만 잘 타면 인천 앞바다에 당도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육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일이 어긋났다. 남향하는 해류가 예상보다 빨라 뗏목이 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론은 현실에 부딪히면 무너지기 마련이라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당혹스러웠다. 항로를 찾는 것보다 생존이 더 큰 문제였다. 그와 탐험대원들이 해류를 역행하며 북상하느라 진땀을 뺀 지 1주일 후에야 뗏목은 서해에 거대한 ‘U’자를 그리며 덕적도 앞바다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5m나 되는 파도가 덮쳐 왔다. 결국 돛이 찢기고 활대가 부러진 뒤에야 그의 배는 4월1일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뗏목을 타고 낙동강을 탐사하면서 그는 탐험가의 삶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국 각지의 동굴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더 이상 탐사할 동굴이 없어질 무렵 그의 시야에 바다가 들어왔다. 1982년 그는 한·일간의 고대 항로를 체험하겠다면서 대한해협에 뗏목을 띄웠다. 그러나 33시간 항해 후 대마도를 코앞에 둔 채 눈물을 머금고 구조 연막탄을 쏘아야 했다. 뗏목이 서서히 가라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재도전해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다. 1996년에는 중국 저장성에서 산둥 반도까지, 1997년에는 중국 저장성에서 흑산도를 거쳐 인천까지 뗏목 탐사에도 성공했다. 이번이 네 번째 바다 횡단이다. 그는 육지 탐험도 계속해서 그동안 일본을 30여 차례, 중국을 20여 차례 다녀왔다. 1995년에는 43일 동안이나 말을 타고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탐사한 적도 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취재진을 배웅하려고 부두에 올라서던 그가 멀리 월미도 쪽 육지를 쳐다보며,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진달래가 너무 좋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도 내년이면 쉰, 땅이 그리워질 때도 되었다.

그의 탐험대는 4월10일 인천을 떠났다. 그는 위성항법장치(GPS)로 좌표를 찾고 아마추어 무선통신(햄) 동호인들과 교신하며 현재 바다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규슈에 도착하기로 된 날은 4월22일. 주파수를 7.090MHz로 맞추면 그와 접속할 수도 있다.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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