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천하의 ‘백가쟁명’ 신인류
  • 정윤희 (컴퓨터 칼럼니스트) ()
  • 승인 2003.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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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탄생시킨 디지털 종족들, ‘가문의 영광’ 떨치며 번성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가문과 족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 우리 모두 같은 고향과 같은 뿌리를 갖게 되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는 ‘인터넷’ 고향 말이다. 인터넷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인류들을 보면 그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보보스·엄지족·디카족·골뱅이 세대 등 이제 종족을 나누는 기준은 바뀌었고, 날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족이 탄생한다. 급기야 피라미드 모양으로 진화까지 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온 신조어 4백8개 가운데 정보 통신 관련 용어가 단연 돋보였던 것도 그 증거이다. 인터넷에서 태어나, 화려하게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여러 족(族)들의 ‘가문의 영광’을 하나씩 헤아려 보자.

인터넷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족의 시조(始祖)는 네티즌이다. 넷(Net) 세상에 사는 시민(Citizen)들을 모두 네티즌이라 부르고, 아주 어려서부터 인터넷과 디지털을 접한 사람들을 N세대라 부른다. 이를 근간으로 점차 파생되기 시작했는데, 그중 최근 단연 돋보이는 종족이 바로 보보스(Bobos). 보보스는 보헤미안과 부르주아를 합쳐 만들어진 말로, 보헤미안의 개방적인 면과 떠도는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경제적인 안정도 누리는 신 엘리트 귀족층을 일컫는다. 이들은 상당한 연봉을 받으며, 문화·패션 등을 즐기며 자신만의 개성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 합리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 주로 IT(정보 기술) 업종에 종사하는 보보스들은 돈이나 보석, 집보다는 지식과 정보, 아이디어를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는 보보스족은 어느새 한국에도 상륙해, 코보스(Kobos)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코보스는 보보스와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지만, 떠돌고 싶어하는 방랑끼는 다소 덜어냈다. 변호사·의사 등의 직업군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삶의 방식이나 의식주를 기준으로 나뉘는 종족이 있는 반면, 특정한 문화를 즐기거나 디지털 장비를 장난감처럼 사용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족들도 다양하다. 최근 필름 카메라의 판매량을 누르고 우뚝 선 디지털 카메라는 이제 휴대전화만큼이나 빠뜨릴 수 없는 필수품으로 떠올랐다. 밥 없이는 살아도 디카 없이는 못 산다고 외쳐대는 디카족들은 생활기록주의자다. 필름이 필요 없어 눈뜨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눈 감고 자는 순간까지 일상을 계속 찍어댄다. 역사를 기록하는 네티즌들의 새로운 방식인 셈이다. 더 이상 생일·졸업·여행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은 없다. 하루 24시간이 디카족들에게는 모두 기념해야 할 대상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휴대하기도 편하고 바로 찍어 메일로 날리는 폰카족까지 등장했다. 핸드폰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찍고 옆 사람 핸드폰으로 쏘아주고, 저장 화면으로 보관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동영상으로 저장해 버리는 캠폰족도 있다. 공연장이나 행사장, 각종 이벤트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이제 핸드폰을 높이 들고 촬영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선 장면이 아니다.

사실 폰카족이나 캠폰족은 엄밀히 따지면 엄지족에서 분산된 족들이다. 엄지족, 엄지손가락이 기이하게 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엄지족은 핸드폰을 이용해 문자 메시지, 게임, 무선 인터넷 등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 양쪽 엄지 손가락을 주로 사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엄지손가락 하나로 버튼만 길게 눌러주면, 저장된 그 혹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엄지손가락으로 묘기 부리듯이 버튼 사이를 누비다 보면, 하고 싶은 짧은 말을 그, 혹은 그녀에게 전해준다. 어쩌면 지질학자 다윈이 발견한 갈라파고스 섬의 새들처럼, 우리의 후손들은 진짜 엄지손가락이 큰 ‘왕엄지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초고속 인터넷에 이어 무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오프라인에서 인류의 조상이었던 유목민들이 온라인으로 옮겨가 디지털노마드(Digital Nomad)족으로 떠올랐다. 유목민이라는 노마드(Nomad)가 디지털과 찰떡 궁합으로 뭉쳐진 디지털노마드는 첨단의 최신 장비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디지털 마인드로 사는 신인류를 말한다. 무선 인터넷이 되는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선이 없는 노트북으로 채팅을 즐기고, 대학 캠퍼스를 걷다가 벤치에 앉아 친구에게 e메일을 보내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나도 움직이는 거야’를 외치며 거침없이 돌아다니면서 디지털을 즐기는 진정한 방랑자, 그들이 디지털노마드족이다. 이 종족에서 좀더 학구적인 사람이라면, 모잉족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Mobile English Study 족(族)’을 줄여 모잉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을 찾아보는 일은 쉽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렸을 때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잉족은 핸드폰이나 PDA를 이용해 토익과 토플, 영어 단어, 프리토킹에 관한 무선 콘텐츠를 즐긴다. 손바닥만한 액정을 보면서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이들에게 핸드폰은 개인 강사가 된다.

인터넷의 신인류에게는 나이 제한도 없다. 최근 급속도로 떠오르고 있는 파워 그룹이 있으니 바로 실버(Silver)족이다. 인터넷은 나이·성별을 불문하고 즐겁고 신기한 세상을 열어준다. 40, 50대 중장년 실버족들은 이미 우리보다 많은 경험을 하고 연륜을 쌓았기에 마우스를 쥘 자격이 충분하다. 실버족도 고스톱과 바둑 같은 고전 게임을 즐기는 실버 게임족과 서핑을 즐기는 실버 서퍼족으로 나뉘는데, 여러 종족들과 함께 당당히 인터넷 족보에 자리매김을 하는 중이다.

그 밖에도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끼는 물건과 문화를 즐기는 어른들을 일컫는 키덜트(Kidult)족, 아이디어 가득한 물건이나 새로운 디지털 장비를 쫓아다니며 즐기는 얼리어댑터(Earlyadopter)족, 게시판 글에 목숨을 건 듯 리플만을 전문적으로 다는 리플(Reply)족, 인터넷을 활용해 육아와 생활 정보를 얻고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미시 주부들을 가리키는 웹시(Webssy)족, 온라인 분신 아바타에 열정을 바치는 아바타(Avata)족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종족이 존재한다. 이 종족들은 더 세분화해 수십 가지로 퍼지기도 하고, 어떤 족은 반짝 유행하다가 금새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타 크래프트>의 저그·테란·프로토스 세 종족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투지만, 사이버 세상의 종족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나아가 새로운 종족까지 퍼뜨린다. 여기 소개된 수많은 종족 가운데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한 가지에 속할 수도 있고, 여러 족에 해당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종족에 얼마나 많이 속했느냐가 아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를 얼마나 잘 살아가느냐를 평가하는 척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성과 기호에 맞게 디지털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종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지털족의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새로운 종족이 인터넷 족보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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