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씨앗’ 일본이 뿌렸다
  • 박기영 (비디오 저널리스트, 시인) ()
  • 승인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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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반도의 흥남과 대전에서 원폭 개발 계획을 진행했다. 일제 패망 후 흥남 지역의원폭 관련 설비와 연구 결과가 소련에 넘어갔고, 이를 계기로 촉발된 미·소의 수소폭탄 개발 경쟁이 한국전쟁의 한 원인이
북한 핵 문제를 놓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마침내 한 테이블에서 만나게 되었다. 6자 회담 형태로 이마를 맞대는 당사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반도 핵 문제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한반도 핵 문제는 6자 회담에 참석하는 주변 4개국이 저마다 일정 부분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 한반도에서 핵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은 현 북한 정권이나 미국 정부가 아니라 일제 시대 군국주의자들이다.

필자는 북한 핵 문제를 단순히 북한 정권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한반도 핵 문제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오늘날 북한 핵 문제는 주변 국가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한 비밀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과정이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주변 국가들이 개입한 흔적이 하나씩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핵무기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일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2차 세계대전을 원자폭탄 개발 전쟁이라고 규정한다. 2차 세계대전 개전과 더불어 관련 국가들이 일제히 원자 무기 개발을 검토했거나 시도했고, 실제로 그것을 확보한 국가가 승전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극비리에 원자 무기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고, 그것에 실패하자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의 원자 무기 개발은 지금까지 그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진 적이 없다. 패전과 더불어 관련 시설과 연구 성과를 미국이 수중에 넣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의 원자 무기 개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든 것은 독일의 오토 한이 ‘바륨 행진곡’이라는 핵분열 사실을 발표하고 난 직후부터다. 1940년 제국육군항공기술연구소 야스다 다케오가 처음으로 핵폭탄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확인되자 그는 우라늄 237을 발견한 니시나 요시오가 연구 책임자로 있는 일본 도쿄제국대학 이화학연구소에 개발을 의뢰했다.

지난해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 이화학연구소에는 미국으로부터 한 건의 문서가 반환되었다. 1941년 일본 육군의 ‘동2조연구소’가 검토한 핵폭탄 개발 계획서였다. 이 문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 폐기 처분되지 않은 문서 가운데 하나로, 당시 일본·한반도·만주 일대의 핵 물질 개발 가능 지역이 담겨 있다.

이 문서에 한반도 지명이 등장한다. 바로 황해도 해월면, 현재 북한의 원자력 관련 시설이 있는 황해도 연안군 해월 지역이다. 당시 한반도 방사선 물질 조사는 도쿄 제국대학 지질학자인 이오모리 사토야스가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사 결과 당시 한반도에서 확보할 수 있는 우라늄 양은 모두 2천6백만t. 이를 발굴하기 위해 평양이연광업주식회사라는 위장 회사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핵폭탄 개발 계획은 두 군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육군과 손잡은 도쿄 제국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군과 결탁한 교토 대학이었다. 로버트 월콕스가 쓴 <일본의 비밀전쟁(Japan’s Secret War)>에 따르면, 1942년 도쿄의 해군회관에서 장교들이 모여 원자 무기 개발 지원 대회를 열었고, 따로 지원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육군과 해군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이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의 암호명은 ‘2호 작전’. 도쿄 제국대학 이화학연구소 니시나 요시오가 주축이었고, 사가네 요기치 등이 참여해 ‘작전’을 진행했다. 당시 도쿄 제국대학 47호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이클로트론(입자가속기. 원자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임계질량 계산을 위한 장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 육군은 열확산법을 통한 우라늄 추출 방법을 택하고, 한반도·만주·버마 등지에서 우라늄 원석을 확보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 해군이 추진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의 암호명은 ‘F작전’. 나고야에 있는 함대 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교토 대학과 함께 원자폭탄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전후에 ‘아라카츠 프로젝트’라고 명명된 이 연구에는 아라카츠 교수 휘하에 있는 교토 대학 화학연구실이 참여했다. 이곳에는 한국 과학자 두 사람이 소속되어 있었다. 광복 이후 한국 과학계를 대표하게 된 이태규 박사와 이승기 박사. 이승기 박사는 북한이 원자력 개발 기구를 처음 만들었을 때 초대 책임자로 활동했다. 일본 해군이 개발하려 했던 우라늄 농축 방법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것. 1943년 교토 대학에 지원된 자금 60만 엔은 미쓰비시 사가 제작을 맡은 원심분리기 개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4년부터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은 전환기를 맞았다.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전역을 사정권에 넣자 일본 육군과 해군은 원폭 관련 주요 시설을 한반도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때 떠오른 지역이 흥남과 대전이었다.

육군의 2호 작전 관련자들은 대전으로 향했다. 항공기 피스톤 생산 공장으로 위장한 일련의 시설들이 1944년부터 대전 지역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사 책임자가 전후 일본 총리를 역임한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그는 대전에 한국이연공장을 완공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다가 패망과 더불어 철수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핵 연구 시설이 대전에 들어서고 옥천 우라늄 광산 개발에 일본인이 참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 북부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일본 해군 관할지였던 흥남 일대에서 진행된 ‘NZ 프로젝트.’ 이 비밀 프로젝트는 일본 해군의 F작전에서 파생한 것으로, 흥남 비료공장 일대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흥남의 해군 연료 공장과 화약공장, 그리고 주을과 이안의 우라늄 광산을 연결하는 별도의 핵 프로젝트였다.

이같은 일본의 움직임은 미군 첩보기관 OSS에 감지되어 1945년 2월 보고서가 미국 정부에 올라갔다. 당시 보고서는 오사카 일대에 있는 일본제철 시설이 청진으로 옮겨가고, 동위원소 분리기가 흥남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 다른 보고서에는 흥남에 플루토늄 504kg이 하사가와라는 인물의 책임 아래 관리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

일본의 핵 개발 프로젝트가 흥남 지역으로 이동한 이후, ‘흥남 폭발’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터졌다. 흥남에서 일제가 개발하던 원자폭탄을 항복 직후에 폭파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패망 직후, 미국은 한반도 원자 무기 관련 파일을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 수립 이전부터 한반도 핵 감시 파일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흔적들은 태평양사령부의 정보 보고서인 ‘G2 보고서’를 통해 일반에 노출되기도 했다. 얼마 전에 비밀이 해제된 G2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은 서울 지역에 있는 핵물리학자를 감시하고, 한반도 남부의 방사선 물질 이동 기록을 매달 점검했다. 그 보고서는 태평양사령부를 거쳐 국방부에까지 올라갔다.

미국은 남한 지역에 남아 있던 핵 관련 시설을 파괴했다.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있던 사이클로트론을 없애버렸다. 이것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사이클로트론 5개 중에서 유일하게 본토 밖에 있던 시설이었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철수한 이후 미국이 걱정한 것은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중수(플루토늄 생산과 원자로 제어에 필수이다) 생산 시설과 미확인 원자 무기 개발 시설이 소련 손에 넘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우려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군사과학정보국 산하 요원들을 투입해, 일제가 연구하고 있던 원폭 관련 설비들을 장악했던 것이다.

소련 요원들은 레닌그라드 대학교 여교수를 중심으로 흥남비료공장의 모든 시설을 하나하나 접수하며, 관련 인사들을 조사했다. 소련은 관련 기술자들을 소련으로 이송하고, 주요 설비를 뜯어 가져갔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이전 작업’에 다무라라는 일본인 기술자가 적극 협조했는데, 나중에 그는 소련에서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흥남을 장악한 소련은 몇몇 공장을 패쇄하고, 그 안에서 소련·일본·독일 과학자들이 비밀 작업을 벌였다. 1948년 작성된 미국의 한 비밀 문서에 따르면,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흥남 공장의 특정 시설에서 무엇인가를 생산하여 그것을 두 달에 한 번씩 잠수함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비밀 작업에 대해 미국측은 저지 작전을 벌였다. 당시 흥남 지역 보안책임자로 근무하던 한 미전향 장기수의 증언에 따르면, 1948년 이후 흥남 공장 일대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태업에는 미군 정보기관 관련자들이 개입했다는 것이다(김석형 구술 <나는 조선공산당원이오> 참조).

흥남 공장의 설비 외에도 북한이 소련 원자폭탄 개발에 일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개발해 놓았던 우라늄과 모나즈석 광산들이다. 1948년 북한은 소련과 희귀 광물 무역협정을 맺고, 2만8천t에 가까운 모나즈석을 제공하기 위해 북한의 여러 지역을 파헤쳤다. 황해도 해주 일대에서는 수천 명이 노천광에서 모나즈를 선별해 소련으로 보냈다. 함경도 무산과 주을 광산 역시 소련군의 통제를 받았다. 그 대가로 북한은 소련에서 군사 무기를 지원 받았다.
미군 첩보 당국이 이같은 정황을 파악해 보고를 올리는 동안에도, 미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자국 원자폭탄의 개발 성과를 과장하는 데 열심이었다. 소련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수준을 따라 오려면 숱한 시간이 걸린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199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포럼 때 메릴랜드 대학에서 참석한 한 토론자는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민간인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45년 이후 북한 지역에서 원자폭탄과 관련된 정보가 끊임없이 태평양사령부로 올라 왔으며, 초기 소련의 원자폭탄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토륨형 원자폭탄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대 핵 개발사에서 유명한 간첩 사건인 로젠버그 사건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미국 정보 당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기술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 로젠버그 덕분에 소련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소련이 토륨형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면, 그것은 로젠버그를 통해 흘러들어간 미국의 기술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 즉 흥남 지역에서 넘어간 일본 기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9월23일,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자 미국에서는 비밀 회의가 열렸다. 당시 참석자는 미국의 원자력위원회 관계자들과 국방부 고위 간부, 그리고 국무부 애치슨 장관이었다. 애치슨은 한반도를 미국 방어권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을 설정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이 날 회의에서 미국은 수소폭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수소폭탄 개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평화시에는 의회가 그만한 규모의 예산을 통과시킬 리 만무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학설 가운데 1980년 이후 가장 각광받고 있는 이론이 미국 브루스 커밍스의 ‘남침 유도설’이다. 그러나 이 남침유도설은, 미국이 남침을 유도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반대 의견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소련과 원자 무기, 즉 수소폭탄(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을 기폭 장치로 사용한다)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유도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당시 북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은 미국 정부 당국자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흥남 지역에서 소련·독일·일본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북한 곳곳에서 원자폭탄의 원료가 될 수 있는 우라늄과 모나즈, 흑연감속로의 재료가 될 수 있는 희귀 광물들이 소련으로 공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몇 가지 이익을 얻었다. 소련이 북한 흥남 지역에서 확보하고 있던 미확인 원자 무기 지원 시설을 철저히 파괴할 수 있었고, 북한에서 소련으로 공급되던 원자 무기 원료를 파괴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은 전체 도시의 95%가 파괴되었다. 전쟁 기간에 이처럼 완벽하게 초토화한 도시는 없었다. BBC 다큐멘터리 <핵전쟁 시대>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수소폭탄 개발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쟁 기간 미국의 국방 예산은 평년의 3배에 이르렀다.

원자 무기 개발 경쟁을 키워드로 하면, 소련이 한국전쟁 당시 공군을 투입해 전쟁에 개입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74쪽 상자 기사 참조). 미군이 중공군에게 패퇴했던 장진호와 초산호 일대가 흥남 공업단지의 전력 공급처였고, 남북이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한탄강 일대는 그 무렵 핵무기 개발 국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세계적인 모나즈와 우라늄 매장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8·15 58주년을 지나, 8월 말이면 한반도 주변 4개국이 베이징에서 열리는 6자 회담에 참석한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분단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있는 그들은 한반도 핵 문제와 관련된 이 ‘오래된 기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만 의견을 교환할 것이다.

한반도만큼 핵무기 개발 역사를 압축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지역은 없다. 일제에 의해서 일단의 연구가 시작된 이래 냉전의 두 주역인 미국과 소련이 거쳐가며 피비린내 나는 ‘동란’이 일어났다. 분단된 이후 남과 북 두 정권이 핵 개발을 시도했거나,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남과 북, ‘4자’ 어느 누구도 한반도 핵 문제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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