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노의 저주’ 막 내릴까
  • 김병주(자유 기고자)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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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85년 악연…올 챔피언 결정전에서 다시 격돌
메이저 리그 숙명의 라이벌인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김병현 선수가 마무리로 활약해 더욱 관심을 많이 모으고 있는 레드삭스와 최고의 명가로 평가받는 양키스. 한 세기 가까이 지속되어온 두 라이벌의 맞대결에 미국 전역이 후끈 달아올랐다. 축구의 한-일전을 연상케 하는 보스턴과 뉴욕, 이 두 팀이 맞붙을 때면 선수는 물론 관중석도 치열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밤비노의 저주’로 대변되는 보스턴과 뉴욕의 악연은 85년을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이미 다섯 차례나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엘리트 팀 레드삭스에 비해 신생 팀 양키스는 인기도 전용 구장도 없는 삼류 팀이었다. 1919년 시즌 직후, 레드삭스는 투수 겸 타자로서 1918년 우승하는 데 주역으로 활약했던 베이브 루스를. 현금 12만5천 달러를 받고 양키스로 보냈다. 1919년 홈런을 29개나 날려 신기록을 세운 루스는 이적한 첫해인 1920년 홈런을 무려 54개나 뿜어내며 뉴욕 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탈리아계가 유난히 많았던 뉴욕 팬들은 ‘베이브’를 ‘밤비노’라고 부르며 연일 양키스 경기장에 운집했다. 루스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은 양키스는 1923년 드디어 양키스타디움을 지었다. 이로 인해 양키스타디움은 ‘루스가 지은 경기장’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친정팀 레드삭스와의 개장 경기를 홈런포로 자축한 루스는 그 해 양키스에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선사했다. 이때부터 ‘밤비노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양키스가 스물여섯 번이나 우승하는 동안 보스턴은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레드삭스는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주저앉았다. 보스턴은 1946년과 1967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두 차례 모두 7차전에서 석패했다. 197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신시내티 레즈에게 7차전에서 패해 밤비노의 저주설은 점점 거세게 고개를 들었다. 1978년 14 게임 차로 수위를 달리던 레드삭스가 4게임 차로 추격당한 9월 초, 안방인 펜웨이파크에서 양키스에 총 스코어 42-9로 충격적인 4연패를 당했다. ‘보스턴 대학살’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패배로 레드삭스는 결국 동률 선두 양키스와 리그 우승 결정전을 치러야 했다. 4-2로 승리를 눈앞에 둔 8회, 그 해 홈런이 단 4개인 물방망이 타자 벅키 덴트에게 3점 홈런을 얻어맞으며 레드삭스는 또 한번 양키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졸지에 역적이 되어버린 당시 레드삭스 감독이 지금 네 차례 우승을 이끈 양키스의 벤치 코치인 돈 짐머라는 사실은 두 팀 간의 묘한 인연을 대변한다.

집요하리만큼 맹목적인 레드삭스 팬의 거듭된 좌절과 양키스에 대한 열등 의식은 1984년 로저 클레멘스라는 초거물 투수가 입단함으로써 장밋빛 꿈으로 바뀌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1986년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한 레드삭스는 60년 만의 우승을 목전에 두었다. 하지만 뉴욕 메츠와의 6차전에서 1루수 벅크너의 전설적인 ‘알까기’ 실책으로 다 잡았던 경기를 놓쳤다. 결국 7차전마저 내주고는 또 한번 ‘뉴욕’과의 악연에 울고 말았다.
1980∼1990년대 초반까지 보스턴은 부진을 거듭한 양키스를 제쳤지만 번번이 우승 목전에서 무릎을 꿇었다. 반면 양키스는 1996년 18년 만에 우승컵에 입을 맞추었다. 환호하는 양키스타디움 한복판에 10년 넘게 레드삭스의 간판 타자로 활약했던 웨이드 보그스가 있었다. 그가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기마 경찰 말을 타고 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모습을 지켜보며 레드삭스 팬들은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레드삭스는 ‘외계인’이라고 불리던 당대 최고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영입해 ‘숙적’ 양키스와 월드 시리즈를 놓고 다시 맞붙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컵을 4연승으로 안았는데, 주역은 바로 13년간 몸 담았던 레드삭스에서 쫓겨난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였다.

‘밤비노의 저주’를 씻기 위한 보스턴 팬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루스의 손녀를 펜웨이파크로 초대해 시구를 맡기고, ‘밤비노의 저주 따위는 없다’는 내용의 연설을 시키는 것은 기본. 심지어 어느 연못에 루스가 홧김에 밀어넣은 피아노를 건져내면 저주가 풀릴 것이라며 지역 주민들이 잠수부를 동원해 피아노를 찾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구단주가 바뀌어도 양팀 간의 경쟁 의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지난 오프 시즌에 쿠바 출신 투수 콘트레라스를 놓고 경쟁하다가 양키스에 빼앗긴 구단주 래리 루치노는 양키스를 향해 ‘악마의 제국’이라고 말했다. 양키스 구단주 스타인브레너도 시즌 종반 레드삭스에 연패하며 추격당하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팀에 내려보내기도 했다.

팀 창단 100주년을 맞아 지터-윌리엄스-리베라-포사다 등 순수 혈통을 중심으로 우승컵을 탈환해 자축하려는 양키스, 그리고 마르티네스-라미레스-오티스 등 도미니카 삼총사를 위시한 외인 부대를 앞세워 85년 간의 저주를 마감하려는 레드삭스. 야구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뉴욕 팬들이 웃게 될지, 아니면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 묘비명에는 ‘레드삭스가 우승하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쓸 것이다”라는 열혈 보스턴 팬들의 소원이 성취될지, 올 가을의 전설은 또 다른 볼거리를 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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