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중국인들 ‘신화교’ 시대 열다
  • 박성준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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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진출하는 중국인들이 달라지고 있다. ‘산업 연수’라는 이름 아래 고단한 삶을 엮어가던 그들이, 이제는 높은 학력과 경쟁력을 갖춘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속의 한국인들이 현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면, 한국 속의 중국인들은 지금 ‘신화교 시대’를 활짝 열어젖뜨리고 있다. 중국인 상당수는 아직도 ‘산업 연수’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들어와 고단한 삶을 엮어가는 실정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저마다 높은 학력에 남부럽지 않은 경쟁력을 겸비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진출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창간 14주년 특별 기획의 마지막 편으로, ‘신화교’들의 한국 생활을 조명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젊고 패기 만만한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스스로를 ‘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열어갈 주인공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기획이 진행되는 사이 중국은 유인 우주선 ‘선저우 5호’를 자력으로 쏘아올렸다. 한국의 젊은 신화교들에게 이같은 사건은 ‘신중화 시대’를 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성전자 수원공장에서 근무하는 몇 되지 않는 중국인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인 위밍샤오(于明曉) 씨. 중국 동북 지방의 명문 하얼빈(哈爾濱) 공대 출신인 그는 대학에 다니던 1998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하얼빈 공대와 인천대가 맺은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처음 적용하는 사례로 인천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인천대를 찾아 그곳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바로 삼성에 입사했다.

위씨가 이 회사에 근무한 지는 1년. 하지만 그는 자기가 속한 부서인 HDD(Hard Disc Drive) 부문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다. ‘중국 영업’ 담당인 그는 중국에 팔 물건의 가격·물량 결정은 물론, 마케팅 전략을 세우거나 장·단기 판매 목표를 세우는 작업에도 빠짐없이 참여한다.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많아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는 그는, 그런데도 한국 생활이 보람 있다고 말한다.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한국의 내로라 하는 기업에서 일하다 보니 배울 것이 많고, 신명도 절로 난다는 것이다.

한·중 교류 10여 년의 경험이 중국 속 한국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듯이, 한국 속 중국인의 삶도 변화시키고 있다. 한·중 수교 초기 중국에 진출했던 대기업 주재원들은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중국에서 독립을 외치고 있다(<시사저널> 제730호 관련 기사 참조). 마찬가지로 한·중 수교 초기에 중국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위씨처럼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이제는 어엿한 한국 기업의 ‘엘리트 사원’이 되고 있다.
삼성중국 기획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샤오위안(董曉媛) 씨도 똑같은 사례이다. 그녀 역시 1998년 하얼빈 공대가 인천대에 학생을 보낼 때 위씨를 포함해 25명으로 구성된 ‘교환 학생 통슈에(同學)’의 일원이 되어 한국 땅을 밟았다. 동씨는 뒷날 한국에 다시 들어와 전공을 국어국문학으로 바꾸고 한국어를 연마했다. 그녀는 지금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주무기로 삼아 서울 본사와 베이징 지사를 오가며 기획 관련 업무 조정에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최근 3~4년 사이 폭증했듯이, 한국에 유학 오는 중국인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중국어 신문 <화꽝바오(華光報)>의 홍영섭 발행인(124쪽 관련 기사 참조)에 따르면, 2000년까지만 해도 한국에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은 2천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중국대사관측에 따르면, 현재는 4천명을 넘어섰다.

유학생 증가는 ‘숫자의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 유학’은 고학력 엘리트층이 한국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주요 통로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가 고도의 전문성과 실무 경험이 요구되는 법률 분야다.

고학력 고급 인력 한국 정착 늘어

현재 한국에는 ‘재한 중국 유학생 법학회’라는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의 회원은 약 30명. 재작년 발족한 이 모임의 초대 회장을 지낸 조선족 출신 임 호(任 虎·중국명 ‘런후’) 변호사는 현재 이 모임 출신으로서 한국측 법무법인에서 활동하는 변호사가 7~8명에 이른다고 밝힌다.

재한 중국 유학생 법학회는 100% 중국인(조선족 포함) 유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 대부분은 중국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재한 중국유학생 법학회가 이처럼 고학력 고급 인력으로 구성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재까지 한국의 법률 시장은 외국인 변호사가 사무실을 낼 수 없게끔 되어 있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중국 국적 변호사들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통로는 ‘한국 유학’이다. 석·박사 과정을 통해 분위기를 익힌 뒤, 한국측 법률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왔다고 하면 으레 단순 노동자들이 산업 연수 등의 형식으로 취업하러 왔거나, 중국측 기업의 주재원으로 파견된 부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중국인의 한국 체류 유형에서 ‘산업 연수’는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양상이 바뀌고 있다. 연예계 종사자나 화가·음악가 같은 예술 종사자 등 자유 직업인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가운데에는 베이비복스의 백 댄서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유니버설 발레단에는 현재 연창(仁暢) 관지엔(關乾) 등 중국인 남성 무용수 2명이 활약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무용 분야에서 중국 제일의 양성 기관인 국가무극원 출신이다. 중의학을 전공한 한의사들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이미 구문이 되어 버렸다.

한국 진출 초기에 일익을 담당했던 기업 상사원 집단 사이에서도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상사원으로 오랫동안 주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아예 정착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주식회사 한윤의 대표이사 직함을 가진 조선족 박 일씨(朴 一 중국명 ‘퍄오이’)가 처음 한국을 찾은 때는 한·중 수교 이전인 1990년. 당시 중국 섬유회사 차이나텍스(중국명 중국방직품진출구공사) 주재원이던 그는 한국 시장에 지사를 설립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이 역시 조선족 출신인 오연희씨(吳連姬 중국명 ‘우롄지’)가 중국 생활을 접고 남편과 합류했다.
한국에 들어올 때만 해도 ‘가갸거겨’를 겨우 구분할 정도로 한국 물정에 어두웠던 박씨는,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 얼굴의 ‘화장발’까지 구별할 정도. 택시를 타면 운전 기사보다 길을 더 잘 알 정도로 다녀보지 않은 데가 없다. 박씨는 이를 바탕으로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 틈틈이 한국인 사업가의 중국 진출을 돕고, 한국인과 중국인을 연결해 주는 일을 자원해서 맡기도 한다.

“한·중 관계 떠받치는 중국측 동력”
학계에서는 이처럼 달라진 한국 내 중국인을 ‘구화교’와 ‘신화교’라는 개념을 동원해 구별한다. 한국에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아 왔으며, 소규모 자영업(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구화교의 본보기라면, 연구 유학·기업 투자·연예 활동 등 지식형 비즈니스를 가지고 한국 문을 노크하는 중국인들은 신화교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얕보다가는 낭패할 수 있다”라고 <화꽝바오> 홍영섭 발행인은 말한다. 예컨대 중국은행 안산지점장은 남북한 합쳐 한국에서 생활한 기간이 14년이 넘는 한국통이다. 이들은 또 같은 또래로서 한국에 나왔다는 동질감으로 탄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이들이 최근 ‘전면적인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있는 한·중 관계를 떠받치는 중국측 동력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한국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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