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 기자실은 날마다 '육박전'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검 출입기자들 ‘피 말리는 취재 전쟁’ 막전막후
“김성철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억대를 주었다고 보면 되죠?” 기자들의 선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글쎄요.”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도 긴장했다. “그럼, 그냥 억대로 쓰겠습니다.” “그렇게 쉽게 액수를 확정하면 우리(검찰)도 편하지.” 문기획관의 선방이었다.

임전무퇴. 그냥 물러날 기자들이 아니다. “수천만원대가 아니라면 억대 아닙니까?” 철벽 수비, 문효남 기획관도 지지 않는다. 문기획관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 눈만 껌벅거리며 알듯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염화 미소, ‘법력’(법조 출입 경력)이 낮은 기자들은 한숨부터 쉬었다. ‘저 미소가 긍정이야, 부정이야?’

11월19일 오후 3시 대검찰청 730호실. 브리핑 전쟁은 20분 만에 끝났다. 속시원한 노획물을 확보하지 못한 기자들은 패잔병처럼 기자실로 물러갔다.

8시40분 ‘모닝 멘트’ 취재로 일과 개시

대선 자금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대검 출입 기자들의 취재 전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각 언론사는 인원을 대폭 보강해 대검 기자실은 60명이 넘는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취재 전쟁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이름하여 ‘모닝멘트’ 취재. 보통 오전 8시40분, 총장과 중수부장, 수사기획관이 출근하면 기자들이 따라붙는다. 대검 현관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길어야 4∼5분 거리지만, 기자들은 속사포처럼 질문 공세를 편다. 송광수 총장은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 그치지만 5할대 적시타를 쳐주었다. 한때 송총장은 “선배들이 전화해서 총장이 왜 그렇게 아침마다 말이 많냐고 하더라”며 출근길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틀 만에 송총장은 ‘수고하신다’는 말로 다시 출근길 멘트를 시작했다. 현재는 2할5푼대 모닝멘트 타율을 유지한다.

“천천히 좀 걸으세요.” 걸음이 빠른 안대희 중수부장의 출근길 취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LG 구본무 회장 출국 금지했지요?” “확인해줄 수 없습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니, 출금이라고 써도 되죠?” “알아서 하세요.” “이학수 삼성구조본부장 출금했나요? 형평성 차원에서 이야기해 주세요.” “알아서 쓰세요.” 11월15일 안대희 중수부장과 기자들의 출근길 선문답이다. 피의 사실 공표 금지와 국민의 알 권리 사이를, 안중수부장은 요령껏 헤엄쳐 다녔다. 척하면 척. 기자들은 구본무·이학수 출금이라고 긴급 타전했다.

취재 전쟁은 오후 브리핑 시간에 정점에 달한다. 일간지 마감에 맞추어 보통 2시30분에서 3시 사이에 매일 열린다. 대검 7층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기자 60여명이 몰려간다. 브리핑은 대검 703호(안대희 중수부장실) 또는 730호(문효남 수사기획관실)에서 열린다. 브리핑이 끝나면, 각개격파식 취재 전쟁이 벌어진다. 삼삼오오 사별로 모여 기사 방향을 논의한다. 이때 특종 취재를 위한 핸드폰 취재가 불이 붙는다. 보안을 위해 핸드폰을 들고 대검 청사 주변을 산보하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된다. 취재 전쟁의 성패는 일간지는 가판, 방송사는 메인 뉴스가 나오면 갈린다. 한 언론사가 특종을 하면, 경쟁사는 물을 먹기 마련이다. 물을 먹으면 독이 오른다.

신사협정 파기 논란으로 언성 높아지기도

11월20일 안대희 중수부장실에서 열린 브리핑 때 신사협정 파기 논란으로 기자들과 중수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다. 그룹 총수가 소환되면,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미리 알려주기로 신사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전날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이 소환되었지만, 검찰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한 일간지가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 소환을 단독 보도하자 다른 회사 기자들은 기겁했다. 가판 보도가 나온 뒤에야 검찰은 소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나머지 언론사는 배가 터지게 물을 먹은 것이다. 물을 먹은 한 기자는 이 날 브리핑에서 “박삼구 회장은 인권이 있고, 김성철 회장은 인권이 없냐. 누구는 소환 사실 확인해 주고, 누구는 확인 안해주고”라며 안대희 중수부장을 몰아붙였다. 다른 기자도 가세했다. “소환 당일 저녁에 내가 전화했을 때는 보고받은 사실 없다고 딱 잡아뗐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통화한 기억이 없다”라고 맞섰다. 그러자 그 기자는 “내 핸드폰 기록을 떼어와서 보여드리겠다”라고 맞받았다. 중수부장이 수사 보안을 이유로 기자들 핸드폰 기록을 조회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한방 먹인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명분으로 내건 치열한 취재 전쟁은 때로는 추측성 보도를 양산한다. 요즘 대검 기자실의 화이트 보드에는 2∼3일이 멀다하고 경고성 메모가 붙는다. 11월21일에는 ‘○○일보 보도는 오보. 허점투성이. 확인된 적 없다’라는 안대희 중수부장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취재 경쟁에 내몰린 대검 기자실의 살풍경 가운데 하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