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정년 퇴임한 ‘간박사’ 김정룡 교수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0.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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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약은 고치겠다는 의지”
1935년 함경남도 삼수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내과 과장 및 동 대학 교수. 현재 서울대 의대 간연구소 소장.

한국 간(肝) 연구의 산 증인인 김정룡 박사가 최근 이삿짐을 꾸렸다. 서울 동숭동 서울대병원 본관 9층 교수연구실에서 서울대 임상병리연구소 건너편에 있는 간연구소 2층으로 옮겼다. 지난 8월31일 정년을 맞아 서울대 의대 교수 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의 퇴임사는 아주 짧았다. 직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자신의 성격을 반성하기도 했지만, 연구·진료·후진 양성 등 어느 것 하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자부심도 털어놓았다.

채 3분을 채우지 않은 퇴임사의 마지막은 뼈 있는 조크로 매듭지었다. “정년을 맞이해 보니 이도 약해지고 눈도 어두워진다. 시력 좋고 이 튼튼할 때 잘 보고 잘 소화하라.” 후학을 위한 당부였다. 강단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그의 하루가 느슨해진 것은 아니다. 그는 가운을 벗지 않았다. 현재 진행중인 C형 간염 백신을 개발해야 하고, 힘 닿는 데까지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서다.

1959년 새파란 인턴으로 서울대 의대에 발을 들여놓은 지 41년. 그의 삶은 현미경과 청진기와 백묵으로 요약된다. 그의 현미경은 1977년 B형 간염 예방 백신을 개발했고, 1983년에는 국산 B형 간염 예방 백신(헤파박스)가 시판되었다. 현재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 가운데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는 1% 이하. 김박사는 B형 간염을 퇴치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숱한 간환자를 치료했다. 1970년부터 1999년까지, 간박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예약을 하고 1년 이상 기다린 환자 1만5천3백90명을 진료했다. 간질환으로는 국내 최다 진료 기록이다. 내년 8월까지 4천 명이 넘는 외래 환자가 예약해 놓은 상태다.

“의학자로서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라고 김박사는 말했다. 간질환은 사회적인 질병이다. 위나 장이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간 질환의 원인은 외부, 즉 사회적인 것이다. 김박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간질환은 전쟁 직후 창궐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창 근대화를 추진하던 세대들은 중년을 넘기며 간에 탈이 나 주저앉곤 했다. 국가적인 재해였다.

그의 연구실에는 ‘구인의국(救人醫國)’이라는 붓글씨가 걸려 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는 이 네 글자가 그의 좌우명이었다. 1970년대만 해도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는 인구 100명 당 10명꼴이었다. 그가 백신을 개발한 이후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는 100명당 4명꼴로 낮아졌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궁핍한 시대였다. 매혈자들이 많았다. 한 번에 혈액 250cc를 뽑아주고 5천원씩 받아가던 시절이었다. 김박사는 매혈자 중에서 몇 사람과 1년씩 ‘계약’하고 백신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한 번에 2~3cc 뽑고 5천원씩 주니까 지원자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열악했던 사회 상황이 간염 백신 연구자에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그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1984년 김박사는 백신을 시판해 발생한 이익(로열티) 32억원과 각종 기부금을 모아 간연구소를 설립해 국가에 기증했다. 그는 현재 이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C형 간염 백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C형 간염은 전체 간염의 20%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11월 혈청 분리에 성공했다. 그는 “단백질은 규명했지만, 사람마다 시기마다 변해서 아직 일관성이 없다. 일관성이 있어야 백신이 된다”라고 말했다. 전세계 관련 학자들이 C형 간염 백신 개발에 매달려 있어서, 4~5년 안에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김정룡 박사는 함경남도 삼수군 출신이다. ‘삼수갑산’의 바로 그 삼수다. 초등학교를 삼수에서 나오고, 중학교는 혜산시에서 다니다가 월남해,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꿈이었다. 어린 동생이 홍역에 걸려 죽는 모습을 보고 결심한 것이었다. 당초에는 면역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막상 환자를 대하고 보니 내과가 적성에 맞았다. 내과 중에서도 대사 관계에 주목했다. 당시 지도 교수였던 한심석 교수(서울대 총장 역임)의 영향이 컸다(훗날 한교수가 그의 장인이 되었다).

김박사는 후학들에게 ‘의사는 배우’라고 가르쳐 왔다. 막노동꾼에서 대통령까지 상대하는 의사는 환자에 따라 다양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는 배우이되 성실한 배우여야 한다. 그는 후학들에게 “너희 어머니, 아버지를 치료하듯이 환자를 대하라.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른다. 전문성보다 성실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의료 행위는 서비스이며, 그리하여 환자는 엄연한 소비자라는 사실도 늘 일깨워 왔다.

지금까지 그가 잊지 못하는 환자는 한 시골 노인이다. 30년 전, 간이 나빴던 촌로를 정성을 다해 치료했다. 완치된 그 노인이 퇴원하며 감사의 표시로 내놓은 선물은 둘둘 말린 신문지 꾸러미였다. 신문지를 벗겼더니 화랑 담배 한 갑이 나왔다. 군대 간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담배를 젊은 의사에게 건넨 것이다. 김박사는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정년 퇴임에 맞추어 그는 책을 두 권 펴냈다. 한 권은 후학들을 위한 전문서 <소화기계 질환>.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교과서다. 다른 한 권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실용 서적으로 <간박사가 들려주는 간병이야기>(일조각 펴냄)이다. 그동안 밀려드는 환자들에게 일일이 답변하지 못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간박사가…>의 첫 페이지는, 간질환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떤 질병보다 예방과 치료가 쉽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간질환에 가장 좋은 약은 ‘고치고 말겠다는 환자의 의지’라며 간에 관한 모든 것을 소개했다.

간과 술은 상극이지만, 한국 최고의 간박사는 폭탄주 5잔 정도는 거뜬히 넘길 만큼 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애주가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사람이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마시는 편이라는 것이다. 간염 환자가 아니라면 술을 마셔도 좋지만, 하루 술을 마셨다면 3일 동안은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충고한다.

간바사는 이제 백묵을 집지 않지만, 정년 퇴임한 뒤에도 후학들과 만난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저널 미팅’을 주관하며 후배들과 함께 최신 의학 정보를 공유한 다음, 대학로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부딪친다. 김정룡 박사는 ‘살아있는 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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